'아동 성착취물 소지'로 벌금형만 받아도 '취업제한'

2020-04-23 12:41:03 게재

관계부처 공동, 디지털성범죄 획기적 근절대책 발표

정부, 유엔아동권리위원회 권고사항 대부분 수용

"온라인 아동 성착취 전담기관 만들어 대처해야"

디지털 성범죄범 검거에 잠입수사(함정수사)가 도입된다. 성매매 연루 아동 등을 '대상아동'에서 '피해자'로 변경해 보호한다. 23일 오전 정부는 국무조정실 주관으로 마련한 관계부처 합동 '디지털 성범죄 근절대책'을 심의·확정했다. 교육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법무부, 국방부, 행정안전부, 여성가족부, 방송통신위원회, 대검찰청, 경찰청은 이날 공동브리핑을 통해 '디지털 성범죄 근절대책'을 발표했다. 정부는 유엔아동권리위원회의 권고사항을 대부분 수용했다.

"무능 검찰·솜방망이 처벌 사법부 반성하라"│'갓갓'으로부터 텔레그램 'n번방'을 물려받아 운영한 닉네임 '켈리' 신 모(32)씨의 항소심 재판이 열리기로 한 22일 '디지털성폭력대응 강원미투행동연대' 회원들이 춘천지방법원 앞에서 피켓을 들고 신씨 사건을 항소하지 않은 무능 검찰과 솜방망이 처벌을 내린 안일한 사법부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냈다. 신씨는 항소심을 앞둔 지난 17일 항소 취하서를 법원에 제출함에 따라 1심 형량인 징역 1년이 그대로 확정됐다. 춘천=연합뉴스 이재현 기자


◆범죄수법 진화로 신종성범죄 사각지대 = 정부는 그동안 2차례에 걸쳐 디지털 성범죄 방지대책을 마련해 왔다. 그러나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에 따른 범죄수법의 진화 및 폐쇄적 해외 플랫폼 사용 등 신종범죄 대응에 한계가 있었다는 것이 관계부처 설명이다. 'n번방 사건'을 통해 볼 때 특정인이 지속적으로 성착취를 당하고, 유료화를 통한 범죄 수익 창출로 기업화되거나 다수가 역할을 나누어 조직화 하는 등 새로운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에 정부는 9개 관계부처와 민간전문가로 구성된 민관합동 TF를 통해 강력한 대책안을 마련했다. 그 과정에서 여성계 및 관련 전문가 등의 의견을 폭넓게 수렴했다.

종전대책들이 불법촬영 등 범죄수단별 타겟형 대책이었던 것과 달리, 이번 대책은 신종범죄에 대한 사각지대가 없도록 디지털 성범죄 전반을 포괄하는 종합대책이라는 것이 정부 설명이다. 이번 대책은 '디지털성범죄 근절' 목표하에, 4대 추진전략으로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무관용 원칙 확립 △아동·청소년에 대한 보호강화 △처벌 및 보호의 사각지대 해소 △중대범죄라는 사회적 인식 확산을 설정했다.


◆미성년자 성범죄, 모의만해도 처벌 = 디지털 성범죄물 제작 등에 대한 처벌이 강화된다. 특히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판매 행위에 대한 형량의 하한을 설정하는 등 처벌을 강화하고 에스엔에스(SNS)·인터넷 등을 통해 아동·청소년 성착취물을 광고하는 행위에 대한 처벌도 신설해 수요자 유인행위를 막는다. 정부는 예비·음모죄를 처벌하는 살인 등과 마찬가지로 합동강간, 미성년자 강간도 중대범죄로 봐 준비하거나 모의만 해도 예비·음모죄로 처벌하도록 법률 개정을 추진할 방침이다.

기업화되고 수익구조화 되는 범죄를 막기 위해 범죄수익 환수도 대폭 강화된다. 해외도피, 사망 등의 경우에 기소나 유죄판결 없이도 몰수가 가능한 '독립몰수제'를 신규로 도입하고, 범행기간 중 취득재산을 범죄수익으로 추정하는 규정도 신설된다.

디지털 성범죄 가해자에 대한 신상공개도 확대된다. 수사단계에서부터 사안이 중한 피의자는 얼굴 등 신상정보를 적극 공개한다. 유죄가 확정된 범죄자의 신상공개 대상이 종전에는 아동·청소년 대상 강간 등 성폭력범으로 한정되던 것을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제작·판매한 자도 추가된다.

◆잠입수사 근거 법률에 마련 = 디지털 성범죄물 유통이 갈수록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등 폐쇄성과 보안성 때문에 탐지가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이를 반영해 범죄자 탐지와 적발이 용이하도록 수사관이 미성년자 등으로 위장해 수사하는 잠입수사를 수사가이드라인을 만들어 디지털 성범죄에 즉시 도입한다. 잠입수사 과정에서의 수사관 보호 및 향후 재판과정에서의 증거능력 등을 고려해 법률에 근거를 마련한다.

온라인 그루밍 처벌 조항도 신설된다. 아동·청소년을 유인, 길들임으로써 동의한 것처럼 가장해 성적으로 착취하는 온라인 그루밍 처벌이 신설된다. '성적 영상물·사진 요구-유포협박-만남요구-만남' 등 일련의 단계를 처벌한다는 것이 정부 설명이다.

미성년자의제강간죄는 13세 미만에만 적용됐지만, 외국 의제강간 기준연령 등을 고려해 16세 미만으로 연령을 높여 미성년자 보호범위를 확대한다.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소지로 벌금형을 받은 자는 그간 학교·어린이집 등 취업제한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새로이 취업제한 대상에 추가된다. 현재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성착취물에 대해서만 소지죄로 처벌이 가능했지만, 앞으로는 성인 대상 성범죄물을 소지하는 경우도 처벌된다. 아동·성착취물 구매죄를 신설해 소지하지 않고 구매만해도 처벌될 수 있다.

◆'대상 아동·청소년'을 '피해자'로 변경 = 성매매 연루 아동 등을 '대상 아동·청소년'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을 '피해자'로 변경해 처벌 대신 보호를 강화한다. 그간 성매수 대상이 된아동·청소년이 '자발적 성 매도자'인 피의자로 취급돼 소년원 감치 등 보호처분 대상이 됨에 따라 신고를 주저하게 되고, 가해자는 이를 악용해 착취를 강화하는 등 보호의 사각지대가 발생해 왔기 때문이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피해영상물 삭제절차를 간소화한다. 현재 심의후 사업자에게 삭제요청을 하는 순서를 바꿔, 먼저 피해영상물을 삭제하고 심의를 통해 삭제의 적절성을 평가한다는 것이다.

개인정보 유출을 통한 온라인상 2차 피해 및 오프라인상 직접적인 범죄위협으로부터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피해자 주민등록번호 변경이 필요한 경우 종전 3개월에서 3주 내로 처리기간을 단축한다. n번방 사건 등에서도 문제됐던 사회복무요원의 행정기관 내 개인정보 취급을 전면 금지하고 복무 중 정보유출 등의 경우 제재를 강화한다.

◆"정부정책 환영하지만 갈 길 멀어" = 전문가들은 일제히 이번 '디지털 성범죄 근절대책'이 "기존 정책의 한계를 뛰어넘었다"며 환영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입장이다.

서승희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대표는 "우리 사회가 아동·청소년 성착취 범죄가 중대한 범죄가 아니라는 잘못된 생각이 있었는데, 이번 정부 대책은 그러한 한계를 깼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서 대표는 이어 "정부는 2017년에도 디지털 성범죄 피해방지 종합대책을 발표했지만 아직도 과제로 남은 것들이 있는 게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김재련 변호사는 "위장수사 등 그동안 시민사회나 전문가들이 오랫동안 얘기해 온 문제들을 정부가 대책에 담아냈다"며 "이제는 속도를 빨리하기 보다는 섬세하게 놓치는 부분이 없도록 전문가들의 의견을 잘 들어서 실현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조진경 십대여성인권센터 대표는 "정말 오랜 기간 수많은 아이들이 희생된 뒤에야 미성년자 의제강간 연령 상향, 대상 아동·청소년 규정 삭제 등의 대책들이 나왔다"며 "아직 선언에 불과한 만큼 현실화 시킬 수 있도록 더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조 대표는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실무 주체가 누구인지 명확해야 제대로 만들어지는지 수시로 체크하고 보완책을 만들어 갈 수 있다"며 "전체 부처를 컨트롤할 수 있는 전담 조직 등이 없다면 이번 대책도 선언에 불과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천주현 변호사(법학박사)는 "디지털성범죄라는 신종범죄의 틈새를 메운다는 취지에 굉장히 공감한다"며 "경제적 이익 박탈이 기업형 범죄를 제지하는 강력한 동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법정형만 상향하는 것이 아니라 선고형에 대한 양형권고기준까지 짝을 맞추는 것은 범죄예방효과가 클 것"이라고 설명했다. 잠입수사 도입과 관련해선 "잠입수사의 용어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고 공청회나 토론회를 통해 전문가 의견을 반영해 형사소송법과 관련법에 허용되는 잠입수사 범위를 세밀화해 규정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최영희 탁틴내일 이사장은 "독일이나 일본은 명백한 범죄 증거가 있으면 위장수사과정에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범죄자는 처벌을 한다"며 "수사과정의 문제는 그것대로 조치하고, 증거 자체를 무효화시키지는 말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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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열 김아영 기자 sona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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