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읽는 정치│4·19 혁명

다시보는 '미완의 혁명'

2020-07-24 12:18:30 게재
한홍구/창비/1만1000원

우리나라 헌법 전문에서는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며 3·1 운동과 함께 대한민국을 관통하는 역사적 사실에 '4·19 혁명'을 명시해놨다. 4·19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한 이유다.

창비가 내놓은 '민주주의 역사공부' 시리즈의 '4·19 혁명'은 해방후 친일을 청산하지 못한 데서 '미완의 혁명'으로 잉태됐다. 5·16은 친일세력의 생존전략이었다.

1960년 3·15 부정선거에 앞서 민주당 부통령 유세를 막기 위해 일요일에 학교에 나오도록 한 것에 항의한 대구 2·28 민주운동은 마산 3·15 의거로 이어졌다. 당시 김주열 학생이 사망했고 4월 11일에야 마산 중앙부두 앞에서 주검으로 떠올랐다. 최루탄이 얼굴에 박혀 있는 채였다.

저자 한홍구 교수는 1987년 6월 항쟁의 불씨를 되살린 박종철 고문치사은폐조작을 떠올렸다. 이어 "초기 사건들이 서울이 아니라 지방에서 시작됐다"는 공통점을 환기시켰다.

종로 4가 천일백화점 앞에서 정치깡패 이정재 패거리가 집회가 해산한 후 귀가하는 고려대 학생들을 두들겨 팬 게 4월 18일이었다. 다음날 시위대는 국회의사당에서 집결한 뒤 경무대로 향했다. 경찰이 실탄을 발포했다. 분노한 시민들의 시위는 더 격화됐다.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했다. 4월 25일에야 동조한 교수들이 이승만 하야를 요구했다. 이승만은 발포명령을 내리지 않고 하야를 선택했다. 미국이 이미 이승만에 등을 돌렸다는 것을 이승만 뿐만 아니라 군 역시 알고 있었다는 게 한 교수의 설명이다. 그는 "이승만의 퇴진은 우리 5천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아래로부터의 봉기에 의해 최고 권력자가 물러난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이때 주목해야 할 게 군에 대한 시민들의 호감이다. 한 교수는 "그 다음해에 벌어진 5·16 군사반란 과정에서 시민들의 별다른 저항이 없었던 것은 이때 시위대를 진압하지 않고 혁명에 어느 정도 동조했던 군대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4·19 혁명의 최대 수혜자인 민주당은 계급적 기반이나 이데올로기 면에서 이승만 정권과 별다른 차별성이 없었다. 장면 정부는 수많은 조작사건의 단초가 된 불고지죄를 국가보안법에 삽입했고 데모규제법을 만들었다. 게다가 4월 혁명에 적극 참여했던 세력들 중에는 당시 5.16을 지지하거나 유보적 태도를 보인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

한 교수는 "지금 4·19세대의 대부분은 태극기 집회에서 만날 수 있다"며 "역사의 발전을 함께 하지 못했다"고 했다. "오랫동안 사람을 지탱하는 힘은 어떤 거대한 원칙 같은 것보다도 부끄러움에서 나오는 것 아닌가 싶다"고도 했다.

박준규 기자 jkpark@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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