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디스커버리 도입 왜│① 국내 대기업의 미국 소송전 이유

미국은 특허침해 입증 증거확보 유리

2020-11-11 00:00:01 게재

국내 제도는 특허권자에 불리

피해기업 88% "증거수집 어렵다"

당사자 자료공개로 침해판단 쉬워

"해외기업이 제도를 악용할 우려가 크다."(업계)

"법원이 피조사자 부담을 고려해 결정하므로 남용 가능성이 낮다."(특허청)

"외국기업에 대한 현지조사 어려워 국내기업만 불리하다."(업계)

"법원이 현지조사를 명령할 수 있다. 이를 따르지 않으면 진행되는 국내 소송절차에서 불이익을 받을 것이다."(특허청)



지난 9일 오후 2시, 경기도 판교에 위치한 반도체산업협회 회의실. 특허청과 반도체·디스플레이산업협회가 만났다. 한국형 증거수집제도(K-디스커버리) 도입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간담회다.

팽팽한 활시위처럼 긴장감이 가득하다. 협회 질의와 특허청 답변에는 날카로움이 묻어있다.

특허청이 K-디스커버리 도입을 추진 중이다. 대기업이 주도하는 반도체·디스플레이산업협회가 반대하고 있다. 이유는 무엇일까.

디스커버리 제도는 재판에 들어가기 전에 특허소송 당사자 양측이 서로 가진 증거와 정보 등을 공개하는 게 핵심이다. 소송 당사자들이 특허침해 사실과 손해 관련 증거를 확보하도록 해 분쟁을 조기에 종결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도입 취지다.

입법도 진행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김정호 의원(8월 24일)과 이수진 의원(9월 24일)은 '특허법 일부 개정 법률안'을 발의했다.

◆침해입증 증거가 관건 =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 논의는 오래 전부터 진행돼 왔다. 그러나 요즘처럼 일부 산업계 반발로 논의가 중단됐다.

2019년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의 이차전지 관련 소송을 통해 디스커버리제도가 다시 부상했다. LG화학이 '이차전지에 관한 특허권·영업비밀 침해'를 이유로 SK이노베이션을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CT)와 연방법원에 소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국내 대기업이 국내 대기업을 상대로 미국에서 소송을 진행한 이유 중 하나가 디스커버리 제도로 알려지면서 주목을 끌었다.

디스커버리 도입은 특허 권리자의 권리보호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다. 현 제도는 특허권자가 침해행위 증거를 수집해야 한다. 특허침해가 대부분 연구소나 공장 내에서 이뤄지고 있어 증거수집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특허 침해자에 유리한 셈이다.

특허청이 올 1월 '최근 5년간 특허침해소송에서 증거확보절차 이용실태'를 조사한 결과, 특허침해소송 경험이 있는 기업 중 88%가 '증거수집이 어렵다'고 응답했다. 침해 행위가 상대방 공장 등에서 이루어지고 있어서다. 변호사 67%는 자료교환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증거확보 부족으로 억울한 피해를 당한 사례는 쉽게 찾을 수 있다.

국내기업 A사는 2015년 태양광 와이어 제품을 세계 최초로 양산하는데 성공했다. 태양광 모듈 업체인 L사와 H사에 독점 공급했다. 중국기업 Y사가 유사한 제품을 모방해 2019년 국내 L사에 저가로 납품했다. 이어 2020년 H사 입찰에도 성공했다.

A사는 중국 Y사를 상대로 특허침해소송을 제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태양광 제품은 B2B(기업간 거래) 제품으로 Y사의 침해 제품을 입수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중국 업체의 기업정보, 침해제품 국내 판매기간, 수량과 매출액 같은 구체적인 정보를 알 수가 없어 특허권자의 손해액 입증도 곤란한 상황이다.

스타트업 B사는 '위치정보에 기반한 지역생활정보 서비스 시스템 및 그 방법'에 관한 특허를 획득했다. 경쟁사 C사가 유사한 방법의 어플을 개발·보급하자 특허침해소송을 제기했다. C사는 B사 특허와 달리 기지국 정보를 사용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맛집 등 매장위치 정보를 제공한다고 주장했다.

C사가 실내에서는 기지국 정보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했으나 이를 입증할 증거를 확보할 수 없어 패소했다. 소송에서 패소한 B사는 다른 기업에 대한 소송도 포기하고 관련 사업을 접었다.

◆분쟁소송 조기 종결 효과 = 디스커버리 제도는 분쟁소송을 조기에 종결하는 효과가 있다는 게 특허청 판단이다. 특허침해 소송의 경우 보통 1심만 16개월이 걸린다. 대법원 최종심까지는 3년 이상 소요된다.

사실확인과 증거확보가 쉬워지면 소송 종결도 빨라져 기업부담이 줄어든다. 실제 미국은 정식재판 청구사건의 80% 이상이 디스커버리 단계에서 화해나 취하로 종결된다.

특허청은 "징벌적 손해배상과 배상액 현실화를 위해서도 강력한 증거확보가 필요하고, 국제적 추세도 원고 입증책임 완화"라며 "디스커버리 도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현재 특허법상 자료제출명령제도는 증거자료 제출을 유도하는 수단으로는 부족하다. 특히 제출된 자료의 진위여부를 검증하는데도 한계를 가진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특허청에 따르면 특허침해 소송에서 방법·화학조성물·장치·B2B 제품·소프트웨어 특허 등은 침해입증이 매우 어렵다.

내용증명을 받거나 소송이 제기되기 직전, 소제기 즉시 관련 증거를 없앤다. 방법이나 조성물 비율을 변경하는 등 증거인멸이나 훼손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증거인멸 자체를 밝히기가 어려워 침해기업은 불리한 자료를 법원에 내지 않거나 아예 없애는 것을 소송전략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대웅제약과 메디톡스 사건에서도 디스커버리 제도의 장점을 알 수 있다.

국내 소송에서 메디톡스가 대웅제약 제품의 전체 염기서열 제출을 요구했으나 대웅제약은 영업비밀이라는 이유로 거부했다. 하지만 미국 ITC에는 제출할 수 밖에 없었다. 디스커버리 절차에서 법원의 제출명령을 거부하면 패소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올 7월 미국 ITC는 대웅제약이 메디톡스의 영업비밀을 침해했다는 예비결정을 내렸다. 우리나라에서는 확보할 수 없는 증거를 미국에서는 확보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진실규명이 가능했던 것이다.

현재 운영되는 증거보전신청이나 검증신청도 실효성이 떨어진다. 충분한 증거로 침해를 소명해야 하지만 피해기업이 침해입증 증거를 확보하기 어려워서다.
김형수 기자 hski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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