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

"동반성장은 시대정신 … 불평등·양극화 해소 방안"

2021-02-22 10:31:49 게재

동반성장 전도사 자임, 포럼·강연 이어가

기업생태계부터 선순환체계 전환 강조

가장 먼저 대·중소기업 동반성장문화 필요

세계는 불평등과 양극화로 몸살을 앓고 있다. 한국사회도 마찬가지다. 고용 없는 저성장과 경기침체는 취약계층에 큰 고통을 안겨줬다. 코로나19로 국가간 계층간 양극화는 더 심화되고 있다. 코로나19 이후가 걱정된다. 사회 각 분야에서 백가쟁명식 의견이 쏟아지고 있다. 최근 정치권에서는 '코로나 이익공유제'를 꺼내 들었다.

해법은 없을까. 이 고민을 안고 지난 8일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을 찾았다. 동반성장연구소는 서울대 인근에 있다. 정 이사장이 2012년 설립했다. 동반성장문화 확산을 위해서다.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이 지난 8일 연구소 사무실에서 동반성장의 시대정신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사진 이의종


"동반성장은 더불어 함께 잘 사는 노력이다." 그의 첫마디는 동반성장에 대한 정의였다. 70대 중반 노신사의 차분한 목소리에는 강한 힘이 실려 있었다.

"부자의 것을 뺏어 나누자는 의미가 아니다. 함께 경제규모를 키워 공정하게 분배하자는 게 동반성장이다." 일부에서 자신의 주장을 오해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실제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라고 불쾌해 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정 이사장과 '동반성장'의 만남은 운명적이다.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를 거쳐 서울대 총장, 이명박정부의 국무총리를 역임하면서 양극화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그는 이명박 대통령을 설득해 '동반성장위원회'를 만들었다. 초대 위원장으로 취임한 이후 '동반성장'을 설파하고 구체화해 우리 사회에 '동반성장'이라는 화두를 던졌다. 정운찬 이사장이 '동반성장 전도사'로 불리는 이유다.

하지만 '초과이익공유제' 도입 주장으로 당시에는 보수 언론과 재벌의 공격을 받았다. '초과이익공유제'는 동반성장을 구체화한 방안이다. 대기업이 목표보다 이익을 더 내면 임직원에게 상여금을 주듯 중소협력업체와도 이익을 나눠 상생해야 한다는 논리다. '초과이익공유제'는 이념논쟁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이명박정부도 나중에는 동반위의 적극적인 활동을 경계했다. 그 후 10년이 지난 지금 '이익공유제'는 우리 사회에서 적지 않은 공감을 얻고 있다.

정 이사장의 굳건한 동반성장 철학은 삶의 궤적을 통해 다져졌다. 그는 충남 공주시 한 산골마을에서 태어났다. 늘 끼니를 걱정해야 했던 가난한 집안의 막내였다. 중학교 입학부터 나눔의 손길 덕에 학업에 정진할 수 있었다. 그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경제학자가 되어서도 사회격차 해소에 집중했다.

한국경제는 선성장·후분배 불균형 전략으로 성장했다. 소수 대기업 중심의 산업구조가 고착됐다. 이로 인해 기업과 가계, 계층 간 양극화를 발생시켰다. 이제 대기업의 낙수효과(top-down track) 한계를 인정하고 동반성장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동반성장이 한국경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다. 경제주체들간의 '자유와 경쟁'도 중요하지만 협력하는 문화와 제도를 더욱 넓고 깊게 구축해야 한다."

정 이사장의 동반성장은 '21세기형 공정한 관찰자'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아담 스미스가 '도덕감정론'에서 주장한 '공정한 관찰자'를 지금 시대에 맞게 변화시킨 것이다. 스미스에 의하면 개개인의 내면에 존재하는 공정한 관찰자가 인간의 이기심을 억제해 경쟁 속에서도 정의와 도덕 원칙을 작동시켜 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시킨다.

그는 저성장과 양극화가 지속되는 지금이야 말로 공정한 관찰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시장의 불균형, 거래의 불공정, 제도의 불합리를 해결해야만 세계적인 경제위기 상황에서도 지속성장이 가능한 한국형 성장모델을 만들 수 있다. 동반성장은 시대정신이자 시대적 명령이다."

정 이사장에게 동반성장은 공동체사회 구성원의 행동기준이자 지속가능한 공동체사회 가치이며 작동원리인 셈이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동반성장이 화두로 떠올랐다. 동반성장 의미는.

동반성장은 '더불어 성장하고 함께 나누자'는 사회운영의 기본원리를 말한다. 따라서 동반성장은 어느 일방에게만 이익이 돌아가는 '승자 독식의 경쟁'을 배제한다. 참여자 모두에게 정당한 몫이 돌아가는 '협력적 경쟁'을 추구한다.

일부에서는 '함께 나눈다'는 지점만 강조하면서 부자의 것을 뺏어 가난한 이들에게 나줘 주는 행동으로 오해하고 있다. 경제규모를 키우면서 분배의 틀을 바꾸는 것이다. '동반'과 '성장'을 하나로 이해해야 한다.

■동반성장을 시대정신이라고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사회는 짧은 시간에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뤘다. 하지만 성장 이면에는 심각한 불평등과 양극화가 자리잡고 있다. 세계 각국도 장기적인 저성장과 극심한 양극화로 몸살을 앓고 있다.

세대, 계층, 도시와 농촌, 지역 등 사회 각 영역의 불균형과 양극화는 매우 심각한 상태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양극화는 더욱 악화될 것이다. 양극화된 사회는 결코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없다. 동반성장은 한국사회가 나아가야 할 길이자, 인류사회가 요구하는 시대정신이라고 생각한다.

■동반성장이 가장 시급히 정착돼야 할 분야는.

가장 절실하고 중요한 지점은 대·중소기업 간 동반성장이다. 동반성장은 기업생태계를 선순환체계로 만들기 때문이다. 대기업의 글로벌 능력과 기술력, 그리고 중소기업의 다양성과 신축성, 벤처기업의 창의성 등 장점을 융합하면 우리 경제가 활력을 찾고 지속성장할 것이라 확신한다. 이는 대기업과 협력중소기업 뿐만 아니라 소상공인을 포함한 저소득 취약계층에게도 과실이 골고루 돌아가게 한다.

■최근 정치권에서 '코로나 이익공유제'를 꺼내면서 동반위원장 시절 주창했던 '초과이익공유제'가 주목받고 있다.

동반성장위원회 초대 위원장을 맡으면서 추진했던 동반성장 정책 세가지가 중소기업적합업종 선정, 정부사업의 중소기업 직접 발주, 초과이익공유제였다. 초과이익공유제는 대기업이 목표한 것보다 높은 이익을 올리면 그 일부를 협력중소기업에 돌려줘 이를 기술개발, 해외 진출, 고용 안정 등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다.

반시장적인 사회주의 발상이 결코 아니다. '코로나 이익공유제'와도 차이가 있다.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오래 전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이익공유를 실천하고 있다.

■선진국 이익공유 사례를 자세히 설명해 달라.

이익공유는 1920년대 미국 할리우드 영화산업 태동기에 처음 도입됐다. 제작자와 감독, 배우가 영화를 통해 얻은 이익배분을 약속한 '러닝 개런티'(running guarantee)가 그것이다. 러닝 개런티는 할리우드 영화가 세계 최고 경쟁력을 갖추는 밑바탕이 됐다. 미국 자동차회사 크라이슬러와 에어컨을 제조하는 캐리어는 목표이익 초과분에 대해 협력사에 보너스를 지급하는 '수익공유계획'을 시행했다. 영국 롤스로이스도 '판매수익공유제'를 하고 있다. 미식축구리그(NFL)도 동반성장 가치로 이익공유를 실천해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프로리그를 만든 사례다.

■초대 동반위원장 시절에 시작한 중소기업적합업종 지정을 평가한다면.

절반의 성공이다. 중소기업적합업종은 단순히 대기업의 지네발식 확장을 막는 것만은 아니다. 중소기업의 살길을 보장해 중소기업이 경쟁력을 갖춰 성장하고 해외진출도 유도하는 게 목적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그러한 중소기업이 많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중소기업은 제도에 안주하면 안된다. 세계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대기업은 기술을 기반으로 세계로 나가야 한다. 골목상권에 진출해 소상공인 밥그릇을 탐하지 말아야 한다.

■현재 동반성장은 정부주도형이라는 지적이 있는데.

한국은 자유경쟁을 보장하는 시장경제사회다. 동반성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정부가 과도하게 개입하는 것은 자제해야 한다. 법적 제도적 기반을 구축하고 시장 감시자로, 건강한 생태계를 조성하는 조력자로 역할해야 한다.

■정부개입이 필요없다는 의미인가.

정부의 지나친 시장개입에 따른 부작용을 경계하자는 의미다. 현실적으로 동반성장을 대기업 자율에만 맡긴다면 남품단가 후려치기와 기술빼앗기 같은 불공정거래가 해결될 수 있을까. 공정한 거래 규칙을 만들고 이를 엄격하게 집행하는 정부 역할은 불가피하다. 다만 지나치지 않으면서도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경제불평등 완화와 지속성장을 위한 방안은.

무엇보다 중소기업 육성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난 50년간 지속된 수출 대기업에 편향된 경제정책이 대기업과 중소기업, 수출과 내수의 균형을 이뤄야 한다.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이 성장의 한 축으로 자리잡고 성과의 과실을 나눠 가질 수 있는 동반성장 경제체제로 전환해야 한다.

■동반성장이 사회운영 원리로 정착하기 위한 과제가 있다면.

우리 사회가 양극화 나락으로 빠져든 이유는 단순히 경제성장 전략의 문제만은 아니다. 보다 근원적으로는 우리 사회의 질서가 서서히 붕괴되고 있는데 있다. 맨 밑바닥에는 불의와 부정이 도사리고 있다고 본다. 사회혁신이 절실한 이유다. 부정과 부패구조가 일소돼야 사회발전을 위한 동력을 얻을 수 있다. 교육혁신도 요구된다. 과거 고도성장 주역은 산업화 맞춤형 인재들이었다. 이제 미래를 이끌 핵심 역량은 유연하고 창의적인 인재들이다.

■동반성장연구소 활동 계획은.

2012년 동반성장연구소를 설립한 목적은 한국사회를 더불어 함께 잘 사는 나라로 만드는데 있다. 우리는 지금 중대 기로에 서 있다. 짧은 기간에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이뤘지만 장기적인 저성장과 극심한 양극화로 사회갈등이 증폭되고 있다. 국민 모두가 불안과 걱정없이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연구소는 국민이 더불어 잘 사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하겠다. 지금까지는 포럼이나 심포지엄 그리고 중소기업 애로 해소에 일조하는 역할을 주로 했다. 앞으로는 내부 연구역량을 키우고 외부 용역도 활발히 수주해 재정을 튼튼히 하려고 한다.

김형수 기자 hskim@naeil.com
김형수 기자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