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산업위원회가 사기꾼에게 명함 파줬다"

2021-03-18 11:36:31 게재

업계 "도피후에도 활동" 원성

가상화폐 ICO 투자사기 의혹도

"허위 경력을 내세운 사람에게 어떻게 대통령 직속위원회에서 고위직을 맡깁니까. 제대로 확인도 안하고선 1조원 짜리 사업을 맡긴 것은, 사기꾼에게 정부가 명함을 파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부산스마트시티 총괄기획자(마스터 플래너·MP) 자리에 오른 '스타트업 전문가' 천재원씨 경력이 허위라는 의혹이 제기된 보도 직후 스타트업계 종사자 등이 울분을 토했다. 천씨가 해외 도피 전 접촉했던 예비창업가 중에는 천씨 소개로 가상화폐 등에 투자를 했다가 투자금을 회수하지 못했다고 하소연했다. 추가 범죄에 대한 의혹까지 제기된 상태다. 천씨가 만났던 한 관료 출신 인사는 "수상쩍은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며 "지방정부에 각종 지원을 요청했지만 하나도 내주지 않았던 게 천만 다행"이라고 말했다.

◆기업인 배제 주장에도 천씨 임명 = 내일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2018년 4차산업혁명위원회는 부산스마트시티 MP를 뽑기 위해 인사추천위회를 구성했다. 이 과정에서 20여명의 전직 공무원, 학계 인사, 기업인 등이 추천됐다. 스타트업 육성기업을 운영한다는 천씨는 기업인으로 분류됐다. 후보 추천 과정에 참여했던 인사들의 기억은 엇갈리고 있지만 천씨 순위는 5위 가량 됐다. 유력후보는 아니었지만 선순위 전직 관료와 대학 교수 대부분은 MP직 제안을 고사했다. 당시 상황을 기억하고 있는 한 대학교수는 "이력서 등을 받지 않고 이름과 현직 등의 정보만으로 후보군을 압축했다"며 "누가 추천했는지 확인할 수도, 기억할 수도 없다"고 말했다. 이어 "이해충돌 문제가 일어날 수 있어기업 출신 배제를 주장했지만 뒤늦게 천씨 경력에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4차위에서 근무하다가 원 소속으로 복귀한 한 공직자는 "관료들이 MP추천 과정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며 전적으로 민간 전문가들에게 맡겼다"며 "서울시와 경기도 황해청 자문역으로 활동하던 터라 이미 그쪽에서 경력 등에 대한 검증이 끝났을 거라고 짐작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료도 "민간자문위원들이 후보자들을 압축한 뒤 MP를 결정했다"며 "당시 4차위 안팎에서도 사업에 대한 관심을 끌어야 해서 신선하고 새로운 얼굴이 필요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흥행성을 노리다보니 충분한 검증을 거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에 민간전문가들이 이해충돌과 검증필요 등의 이유로 기업인을 배제하자는 의견을 냈지만 묵살됐다. 천씨가 경찰 수사로 자진사임하자 4차위 후임자로 국책연구원 출신이 임명됐다.

◆가상화폐 투자사기 의심 = 천씨는 '스타트업 전문가' 내지 '핀테크 전문가'로 활동하면서 가상화폐 사업에 관여했다는 의심을 사고 있다.

2017년 천씨는 A사가 서울의 한 호텔에서 연 '투자설명회'에 내빈으로 참석했다. 투자설명회에서 마이크를 잡은 천씨는 "A사는 유망한 핀테크 기업으로 자신이 영국에 데려가 육성시키겠다"며 참석자들에게 투자를 독려했다. 천씨의 소개로 이 행사에 참석한 ㄱ씨 등은 천씨의 권유로 A사에 투자했다. 하지만 천씨가 국내에서 사라지면서 공교롭게 이 회사 홈페이지도 폐쇄됐다. ㄱ씨는 회사 관계자에게 투자금 회수를 독촉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돌려받은 게 없다. 또 ㄴ씨는 "A사가 간혹 이자는 지급하고 있다"며 "사업하다가 좀 막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며 천씨와 A사를 두둔했다.

가상화폐 분야에 정통한 법조인들은 ICO(코인공개)를 내건 전형적인 투자 사기로 볼 수 있다며 우려하고 있다. 청백공동법률사무소의 도진수 변호사는 "ICO의 구체적인 목적, 구조, 절차, 방식 등 구체적인 사실관계를 따져봐야 알겠지만, 피해자들의 주장을 고려하면 그간 있었던 ICO를 빙자한 전형적인 투자사기, 유사수신 사건과 매우 닮아있다"며 "만약 ICO를 빙자한 투자사기라면 수사기관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ICO를 추진했다고 해도 2017년 하반기부터 정부는 관련 활동을 불법으로 규정한 바 있다. 정부는 2017년 9월 가상화폐의 ICO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이 방침을 현재까지도 유지하고 있다. 현재로서는 앞으로 ICO는 불가능한 상태다, 투자금을 회수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국내 가상화폐거래소 관계자는 "핀테크 전문가라는 사람이 정부의 불법행위 규정에도 투자설명회에 나섰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라며 "각종 포럼에서 포장된 전문가라는 사람이 가상화폐 불법행위에 투자를 종용한 것 자체가 아주 악질적인 행위"라고 지적했다.

벌금 500만원에 도피 = 사실 천씨가 부산스마트시티MP로 선정된 과정에는 큰 문제가 없다. 정부도 학력 등을 배제하고, 실질적으로 사업을 기획할 수 있는 전문가를 필요로 했다. 천씨도 본인 스스로 MP자리를 따내려했단 정황도 없다. 하지만 자문료를 정산하는 과정에서 천씨가 허위 졸업장을 제출하면서 문제가 커졌다. 경찰이 수사에 들어가자 '개인적인 일'이라며 MP에서 사임했고, 검찰에 사건이 송치된 이후 해외로 도피성 출국을 했다.

사문서위조 및 행사 혐의는 중범죄로 보기 어렵다. 1심에서도 벌금 500만원이 선고됐다. 천씨가 해외로 도피하면서 항소하지 못했고, 이 판결은 지난달 확정됐다. 불명예와 벌금 500만원을 가지고 해외로 도피성 출국을 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 앞서 언급한 투자 사기 등이 의심된다. 검찰과 경찰 등에 천씨의 여죄에 대한 수사 여부를 문의했지만 "말할 수 없다"며 답을 하지 않았다. 최근 수사기관이 중요 사건이 아닌 경우의 피의자의 범죄 사실에 대해 언론 등에 알리지 않도록 한 덕분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천씨 주변에 있던 이들은 "천씨가 동남아에서 스타트업 센터를 세우겠다며 투자자를 물색했다"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에서 투자를 받았다고 한다" "우크라이나에서 사업을 모색중이다" 등 각종 근황을 알리고 있다.

천씨가 가장 왕성하게 활동했던 스타트업 단체 카카오톡 대화방에는 "천씨로 인해 추가 피해자가 나오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이 대화방에 참여하고 있는 한 벤처기업가는 "천씨는 자신이 전문가라 스타트업들에게 컨설팅을 제안하거나 투자자를 연결해주겠다고 접근했었다"면서 "하지만 수상쩍은 일이 많아 업계에서는 천씨를 경계한지 오래됐는데 정부가 중책을 맡겼다"고 말했다.

그 사이 천씨는 유럽쪽에서 '월드 스마트시티 포럼'라는 단체를 만들어 스스로 의장 역할을 하고 있다. 그 옆에는 한국정부가 내준 5개월짜리 '스마트시티MP' 경력이 따라가고 있다. 아직까지도 자신이 스마트업 육성업체의 E사 대표라고 하지만 해당 회사 홈페이지에서 천씨 사진은 사라진 뒤 오래다.

각종 의혹에 대해서 내일신문은 재차 천씨의 페이스북 계정으로 취재 요청을 보냈지만 현재까지 어떤 답도 듣지 못했다.

오승완 기자 osw@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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