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눈

한미동맹과 가스라이팅

2021-04-14 12:58:07 게재
지난달 김준형 국립외교원장이 출간한 책 ‘새로 읽은 한미 관계사-영원한 동맹이라는 역설’ 내용이 논란이 됐다. 특히 한미관계 한미동맹을 ‘가스라이팅’(gaslighting)에 비유한 것을 두고 보수층에서 발끈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한미동맹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차관급인 외교부 고위당국자가 어떻게 미국의 심기를 거스를 수 있느냐는 질책이다.

논란이 된 표현은 “70년의 긴 시간 동안 한미동맹은 신화가 되었고, 한국은 동맹에 중독되어 왔다. …압도적 상대에 의한 ‘가스라이팅’ 현상과 닮아 있다”라는 대목이다. 압도적 힘의 차이로 인해 불합리한 요구사항마저 거부할 수 없음을 전제로 한 내용이다. 비판론자들은 한미동맹을 어떻게 가스라이팅에 비유하냐고 흥분한다.

그렇다면 되묻고 싶다. 70년을 이어온 한미관계가 진심으로 대등하고 합리적 관계라고 믿는지. 숱한 주한미군 범죄와 처리결과의 불평등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기지오염 처리비용 문제, 미군 무기구매에 쏟아 부은 천문학적 비용, 유엔사의 횡포, 방위비협상과 전작권 전환을 둘러싼 갈등 등 상식을 벗어난 사례는 차고 넘친다. 때로는 동맹으로, 때로는 안보라는 이름으로 포장돼 사소한 비판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책을 낸 출판사가 설명하듯 우리사회에서 한미동맹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드러내면 그것은 곧바로 ‘빨갱이’ ‘친북’ ‘용공’ 등 이념적 잣대로 공격받아 온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자주외교를 강조해온 학자 출신 외교원장이 이런 현실을 진단하고 나름의 대안적 시각을 보여준 것이 왜 논란이 되는지 납득하기 힘들다. 지금까지 왜 이런 진단과 대안모색이 없었는지를 따지는 게 더 합리적 태도가 아닐까.

더구나 ‘가스라이팅’이라는 용어를 김 원장이 먼저 쓴 것도 아니다. 보수진영 김근식 교수가 지난해 6월과 올해 1월 현정부의 남북관계를 비판할 때 동원한 표현이다. 그때는 이렇다 할 반론이나 반박도 없었다. 가스라이팅은 심리학 용어다. 심리적 조작을 통해 타인에게 지배력을 행사하고, 정신적으로 황폐화시켜 결국 파국으로 몰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친구 연인 가족 등 친밀한 관계에서 주로 발생한다고 한다. 가스라이팅이 성립하려면 친밀한 관계와 압도적 힘의 차이가 전제인데 남북관계는 누가 봐도 적절치 않다.

그런데도 남북관계에는 허용(?)되는 용어가 한미관계에서는 문제시됐다. 친미를 넘어 숭미에 가까워진 이들이 너무나 정확한 표현에 정곡을 찔렸기 때문은 아닐까. ‘미국보다도 더 미국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부끄러운 표현을 이제는 청산해야 한다.
정재철 기자 jcju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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