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기업들, 70년대 인플레대처법 꺼낸다

2021-06-21 11:54:36 게재

소비자에 전가, 생산자동화, 설비 이전 ... 이코노미스트지 “임금 올려도 인재 찾기 힘들어”


주택종합보험은 오늘 기준으로 보험상품 가격을 매긴다. 하지만 지급해야 하는 보험금은 1년 동안의 물가상황에 따라 유동적이다. 때문에 보험사 수익은 인플레이션에 달렸다. 코로나19 확진자가 줄어들고 백신접종자가 늘어난 덕분에 미국 경제가 급속히 재개되고 있다. 미국 보험사 ‘WR버클리’ 창업자인 윌리엄 버클리는 건축자재와 전등, 노트북 등 주택 또는 주택 내 있는 모든 상품의 가격을 면밀히 주시하고 있다. 버클리는 현재 미국 주택의 평균 대체가치가 전년 동기 대비 20% 상승했다고 추산한다. 그는 영국 이코노미스트지에 “이런 때는 없었다. 심지어 1970년대도 지금처럼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소비자물가가 급격히 오르고 있다. 미국의 5월 소비자물가는 전년 동기 대비 5% 상승했다. 2008년 8월 이후 최고치다. 경제학자들은 50년 전처럼 고인플레이션이 지속될지 여부를 논쟁중이다. 미국의 4월 생산자 투입재 가격은 전년 동기 대비 6.2% 상승했다. 세계최대 제조업국가인 중국은 이달 9일 5월 생산자물가가 전년 동기 대비 9% 상승했다고 밝혔다. 13년 만의 최고치였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는 “인플레이션 상승은 일시적”이라고 주장한다. 연준의 확신 때문인지 미국 대기업 CEO들은 인플레이션을 공개적으로 언급하길 꺼린다. 미 제조업·엔지니어링기업 허니웰의 CEO 다리우스 아담칙이 5월 실적발표에서 “인플레이션이 높아진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확연하다”고 말했을 때, 그의 발언은 온라인에서 상당 기간 회자됐다.

“확연한 인플레이션 상승”

언급을 꺼리는 것과 별개로 아담칙과 버클리 등 미국의 많은 경영자들은 고인플레이션 시기를 준비하고 있다. 일부 중간재는 여전히 희소하다. 공급망도 원활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반면 수요는 커지고 있다. 미국 소비자들은 팬데믹 기간 쓰지 않은 저축은 물론 미 정부가 지급한 부양수표도 갖고 있다. 공급과 수요의 이같은 상황은 물가상승 압박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1970년대 기업들은 중간재 가격 인상을 여러가지 방법으로 대응했다. 첫째는 높아진 비용 상당몫을 가능한 한 소비자에게 전가했다. 이 전략이 먹히지 않게 되면 영업, 생산활동을 자동화하거나 더 저렴하고 풍부한 노동력이 있는 곳으로 시설을 이전했다. 미국 내 또는 해외로 옮겼다.

2020년대 기업들은 또 다시 옛날 공식을 꺼내고 있다. 우선 가격인상이다. 코카콜라는 지난 4월 증시애널리스트들에게 “음료 가격을 올릴 것”이라고 말했다. 가전기업 월풀은 “세탁기 등 가전제품 가격을 인상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생활건강용품 기업 프록터&갬블은 오는 9월부터 일부 소비자제품 가격을 5~9% 올릴 계획이다. 요식업체 치폴레는 이달 8일(현지시각) 음식값을 최대 4% 인상하기로 했다. 애완동물 사료기업 로열캐닌 등 일부 기업들은 가격인상을 자제하되 상품 용량을 줄이기로 했다.

노스캐롤라이나 소재 가구제조사 캐롤라이나캐스팅의 CEO 마이클 골드만은 이코노미스트지에 “합성수지 가격은 75%, 목재 가격은 3~4배, 아시아행 컨테이너선적 비용은 1만6000달러에서 2만달러로 상승했다”고 말했다. 캐롤라이나캐스팅은 올해 들어서만 가구 소비자가격을 2배 올렸다. 보험사 WR버클리는 지난해 보험 납입금을 인상한 데 이어, 올해는 인상폭을 더 크게 잡았다. 버클리 CEO는 “우리 보험상품을 판매하는 중개업자들도 불평하지 않는다. 이들 역시 보험금 인상을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수요가 얼마나 억눌렸는지, 기업들의 잇따른 가격인상에도 매출이나 이익엔 별 타격이 없다는 분석이다. 크레디트스위스 조너선 골럽은 “올해 1분기 미국 기업들의 실적은 매우 좋았다. 2분기에도 마찬가지로 좋은 실적을 낼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미국 대기업 순이익률은 상승세다. 이코노미스트지는 “기업들이 추가비용을 부담하라는 압박이 가해져야 하는데, 아직까지 그런 신호가 없다. 이는 인플레이션이 오히려 기업들에게 가격결정력을 쥐어주고 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고 전했다.

하지만 물밑으로 기업들은 더 이상 가격을 올릴 수 없는 시기를 대비하고 있다. 카네기멜론대학 비즈니스스쿨 스리다르 타유르 교수는 미국 3개 대기업에 컨설팅 자문을 하고 있다. 그는 “3개 기업 모두 낭비요소를 철저히 줄이는 제품을 설계하고 있으며 제조과정도 간소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허니웰의 아담칙 CEO는 올해 1월 인플레이션 대응방법을 강구하는 태스크포스팀을 꾸렸다. 미국 전역에 200개 냉동창고를 갖고 있는 물류기업 리니지는 두개의 태스크포스팀을 꾸렸다. 한 팀은 주요 건설프로젝트의 공급 병목현상을 피하는 데 초점을, 또 다른 팀은 구인난이 심화되는 노동시장에서 인재를 채용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인건비 상승은 CEO들의 가장 큰 두통거리다. 일부 기업들은 새로운 인재를 채용하면서도 정기급여 인상을 피하기 위해 단발성 특별보너스라는 유인책을 쓰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 기업들은 정기급여를 올려주는 것말고는 인재를 유혹할 대안이 없다. 뱅크오브아메리카 애널리스트 앤드류 오빈은 “미국 제조업체들이 지급하는 급여는 1년 전보다 약 4% 인상됐다”며 “하지만 노동자들은 직장을 바꿀 경우 임금이 13% 올라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 노동통계국에 따르면 올해 4월과 5월 일반직 노동자 임금은 전년 동기 대비 7% 가까이 올랐다.

“구인광고에 대개 답 없어”

노동자들에게 더 많은 임금을 지급할 용의가 있어도 기업들은 적절한 인재를 찾지 못하고 있다. 금융정보업체 레피니티브 조사에 따르면 미국 기업 거의 절반이 1명 이상의 인재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응답했다. 캐롤라이나캐스팅의 골드만 CEO는 “인재를 아예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누군가를 고용하는 데 얼마나 돈을 들여야 할지 알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구인광고를 내보지만 대개 답이 없거나, 연락이 닿는다 해도 입사지원자들 태반이 면접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소연했다. 이코노미스트지는 “미국인들은 코로나19의 지속적인 위험 때문이든, 아니면 넉넉한 실업급여 때문이든 혹은 두가지 모두의 이유든 일터로 복귀하는 데 주저하고 있다. 따라서 인건비는 앞으로도 계속 오를 전망”이라고 전했다.

인플레이션이 계속 상승한다면, 일부 기업들은 노동력이 풍부하고 저렴한 곳으로 생산설비를 옮길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카네기멜론대 타유르 교수는 “컨설팅하는 3개기업 모두 미국 내 다른 지역 또는 해외로 시설 일부를 옮길지, 옮긴다면 언제 옮길지 등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자동화를 고려하는 기업들도 있다. 미국 기업들의 올해 투자는 전년 동기 대비 15% 늘었다. 이 중 일부는 자동화에 투자되고 있다.

제조업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미시간대 비즈니스스쿨 교수인 에릭 고든은 식당체인들을 거론하며 “일부 요식업체들은 자동 그릴기구를 설치하거나 주문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해 비핵심 인력들을 줄이고 있다. 더 적은 직원으로도 요리와 음식서빙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코노미스트지는 “속속 재개장하는 호텔 상당수가 사람 대신 로봇에 청소를 맡기고 있다”고 전했다. 생산성 향상 투자는 인플레이션이 낮은 시대에서도 사업적 타당성을 갖는다. 많은 CEO들은 인플레이션 여부와 상관없이 계속 추진하길 원한다.

1980년대 미 증권거래위원회(SEC)는 상장사들에게 재무상태표와 손익계산서를 명목 기준, 인플레이션 조정 기준으로 각각 요구했다. 물가인상 압력이 일상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인플레이션이 낮아졌고, 그같은 요구조건도 점차 줄어들었다. 지난해 11월 기준 증권거래위원회는 그같은 요구를 거의 하지 않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코노미스트지는 “SEC가 너무 섣불렀을 수 있다. 아이러니한 상황”이라고 전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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