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최첨단 반도체 제조기지 실현 가능할까

2021-07-23 11:09:58 게재

'전략적 자율성' 차원 거액 투자

공적자금 낭비 우려도 만만찮아

FT "EU, 목적 확실히 할 필요"

프랑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지난달 말 한 컨퍼런스에서 인텔 CEO 팻 겔싱어와 만났다. 반도체 제조 협력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유럽연합(EU)도 반도체 제조 부문 일류리그에 뛰어들었다. 2030년까지 글로벌 반도체 시장 점유율을 2배 늘리겠다는 목표를 정했다. 인텔은 EU의 야심을 실현할 핵심 플레이어다. 인텔은 최근 EU에 '유럽대륙에 200억달러 규모 반도체 공장을 짓겠다'는 계획을 제안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의 22일 보도에 따르면 EU는 '전략적 자율성' 측면에서 반도체 산업을 바라보고 있다. 반도체를 둘러싼 공급망 차질과 지정학적 리스크에 취약하다는 것을 만회하려 한다. 반도체 생산과 관련해 대만 TSMC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것도 리스크다. 중국이 대만을 공격할 우려가 있다. 또 대만은 지진에 취약하다. 반도체 공급 부족으로 자동차 생산이 크게 위축되면서 EU는 결단을 내렸다.

EU집행위원회 티에리 브르통 위원은 FT에 "중국과 한국 대만 미국 등이 자국의 반도체산업을 키우기 위해 대거 투자하고 있다. 유럽도 그처럼 투자하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반문했다.

하지만 우려도 크다. 산업논리, 시장논리를 무시한 채 지정학적 야심만으로 대규모 공적자금을 투자하는 건 무모하다는 지적이다. 유럽은 반도체 공급망과 관련해 세계 최고 수준의 강점을 갖고 있다. 하지만 최첨단 반도체 제조 부문에선 한국과 대만 등 아시아에 크게 뒤처진 상황이다.

유럽 반도체 기업 CEO들은 "상황을 바꾸려면 수년이 걸린다. 게다가 엄청난 공적자금을 투입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게다가 기존 반도체 강국들이 팔짱을 끼고 기다리지도 않는다. 한국과 대만 미국은 반도체 부문에 수백억달러 보조금을 투입하고 있다.

컨설팅업체 '베인앤드컴퍼니'의 반도체기술 전문가인 피터 핸버리는 "유럽은 매우 매우 많은 돈을 써야 한다"며 "그리고 EU 정치인들이 이야기하는 기술 수준에 다다르기 위해선 수년이 걸린다"고 말했다.

반도체산업 골리앗인 한국 삼성전자와 대만 TSMC, 미국 인텔에 비하면 유럽은 상대적으로 피라미 수준이다. 시장점유율이 10%가 안된다. TSMC는 3나노미터 반도체 생산공장을 짓고 있다. 3나노미터 칩은 5나노미터 대비 속도는 15% 빠르고 전력은 30% 적게 쓴다. 반면 유럽엔 22나노미터보다 작은 반도체를 생산하는 공장이 거의 없다. 인텔의 아일랜드 공장은 예외다. 14나노미터 반도체를 양산한다. 인텔은 향후 이곳에서 7나노미터 반도체도 생산할 계획이다.

유럽 반도체 기업들은 최신 반도체 제조와 관련해 아시아나 미국의 기업들과 경쟁하려 하지 않는다. 최신 반도체는 최고급 컴퓨터나 스마트폰, 기타 디지털 장비에 쓰인다. 반면 독일 인피니온이나 네덜란드 NXP, 프랑스-이탈리아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등 유럽 반도체 기업들은 자동차와 항공산업, 산업자동화 부문에 집중적으로 반도체를 공급한다.

기존 사업모델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반도체 공급망의 글로벌 특성을 고려할 때 유럽은 TSMC 등과 경쟁하는 것보다 자체 강점을 가진 영역을 더욱 특화하는 게 옳다고 주장한다. TSMC는 수십년 동안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부문에서 세계 최고의 입지를 구축하기 위해 막대한 투자를 했다. 향후 3년 동안만 1000억달러 설비투자를 계획하고 있다.

이들은 반도체 부문의 세계적 리더기업들과 경쟁하기 위해 거액을 투자했지만 아직까지 성공하지 못한 중국의 사례를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EU도 막대한 공적자금을 들여 최첨단 기술 개발에 나서기보다 기존의 핵심 경쟁력에 더욱 집중해야 한다는 것.

하지만 EU의 반도체 르네상스 계획을 옹호하는 측에선 그같은 입장을 절망적인 현실안주로 간주한다. 그리고 유럽의 현존 반도체 제조사들이 수년 동안 투자를 게을리 했다고 지적한다. EU 집행위의 한 관료는 "반도체 공급망의 재균형이라는 지정학적 전략이 필요하다"며 "자율주행차 등 최첨단 2나노미터 반도체가 필요한 거대시장이 펼쳐질 것이다. 유럽도 이 시장에 참여해야 한다. 최첨단 반도체 생산공장을 구축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점을 고려하면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U 집행위는 최근 '반도체 동맹'을 선언했다. 유럽대륙의 민관 파트너십을 통해 반도체 부문의 새로운 기술을 상업화하는 것이 목표다.

공급망 재균형

EU집행위 티에리 브르통 위원은 2002~2005년 프랑스텔레콤 CEO를 지냈다. 그는 EU 반도체 프로젝트의 선봉을 자처한다. 브르통 위원은 최근 FT와의 인터뷰에서 "EU는 현재 8000억유로 규모 '차세대 EU경제회복계획'을 시작했다. 회원국들에게 유럽의 반도체 산업을 위한 공공투자를 할당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됐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EU는 이미 반도체 선진 기지를 구축할 가공할 만한 플랫폼을 갖고 있다. 세계 최첨단 칩제조장비사인 네덜란드 ASML과 벨기에 나노기술 연구소인 아이멕(Imec)이다. 아이멕은 TSMC와 인텔, 삼성전자 등 일류 기술기업들이 반도체 시제품을 만들기 위해 활용하는 곳이다. 그는 "지정학적 긴장은 지속될 것이다. 유럽은 기업과 시민들에게 반도체 공급 안보를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유럽 반도체 기업들에 탁월한 강점이 있지만 최첨단 칩제조와 관련된 경험과 노하우는 외국에서 빌려야 한다. 최소한 초기에는 미국 인텔에 크게 의존해야 할 형편이다.

이탈리아의 한 고위관료는 FT에 "문제는 유럽이 최첨단 제조기술에 스스로 도달할 수 있느냐, 아니면 인털의 전략에 편승할 수 있느냐다. 스스로 하는 건 매우 위험하고 값비싼 과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그렇다면 우리는 국가보조금 규정 내에서 인텔을 지원하면 되는지, 아니면 파트너십을 맺어 반도체 전 부문에서 완전한 생태계를 구축해야 하는지도 문제"라고 덧붙였다.

설계냐 제조냐

인텔의 공장 신축 제안이 나오자 EU 회원국들은 겔싱어의 환심을 사기 위해 경쟁을 벌이고 있다. 제조공장 부지를 제공하고 연구개발을 지원하고 숙련된 노동자와 막대한 정부보조금을 지급하는 등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인텔은 유럽 공장 신축을 위해 수십억유로 공적자금을 원하고 있다. 인텔 정책·기술 담당 부회장인 그레그 슬레이터는 "유럽에서 반도체를 생산하는 비용은 아시아와 비교해 30~40% 비싸다. 정부지원 수준까지 내려가면 더욱 많은 차이점이 있다"고 말했다.

한국의 경우 정부가 9년 간의 반도체사업 지원정책을 통해 인센티브를 지급한다. 반도체 제조사들은 이에 대응해 4500억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미국은 반도체 산업에 500억달러 이상을 지원하는 안을 논의중이다.

추가로 인텔은 405만평방미터 부지를 원한다. 8개의 반도체 공장을 유치할 인프라를 갖춘 곳이다. 인텔은 독일과 네덜란드 프랑스 벨기에 등을 잠재적인 공장부지로 보고 검토중이다.

인텔이 조만간 2나노미터 생산공정을 시작하기란 어렵다. 아직 그 수준의 기술을 획득하지 못했다. 인텔의 10나노미터 반도체도 선진적 수준으로 평가 받지만 아시아의 경쟁기업과들과의 싸움에선 뒤진 상태다. 인텔은 일부 프로세서 제조를 TSMC에 위탁중이다. 슬레이터 부회장은 "2나노미터 생산은 언젠가 이뤄질 것"이라며 "첫번째 공장이 언제 가동되느냐에 달렸다"고 말했다.

유럽 반도체 기업 CEO들 모두가 EU의 야심에 동의하는 건 아니다. 아부다비 소유의 반도체제조사 '글로벌파운드리'의 경영진 옌스 드루스는 "유럽 자동차제조사 등 제조업체들은 최신 반도체를 원하는 게 아니다"라며 "내 추산으로 2020년대 말까지 유럽 반도체 수요의 90%는 10나노미터 이상일 것이다. EU 집행위는 나노미터에 매몰되지 말고 유럽 산업계가 어떤 기술을 원하는지에 집중해야 한다. 나노미터는 반도체의 하나의 측면일 뿐이다. 반도체 산업계는 매우 복잡해졌다. 나노미터에만 초점을 맞추는 건 EU집행위 전략의 핵심 약점"이라고 지적했다.

독일 싱크탱크 'SNV'의 기술·지정학 국장인 얀-페터르 클라인한스는 "EU가 반도체 설계보다 제조에 초점을 맞추는 건 잘못된 방향"이라며 "칩 설계는 반도체 전 과정 중 가장 부가가치가 높은 분야"라고 말했다.

그는 "반도체는 인공지능과 양자컴퓨팅, 자율주행차 등 신흥기술의 전제조건이지만 특정 기능을 가진 칩셋을 설계하고 제조하는 기업들은 대개 미국이나 대만 국적"이라며 "예를 들어 스마트폰에 사용되는 모바일 시스템칩, 기계학습을 위한 칩인 AI 액셀러레이터, 범용프로세서나 그래픽칩, 데이터센터 프로세서 등도 유럽산은 거의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EU는 그러한 칩이 어디서 제조되는지가 아니라 누가 그것들을 설계하는지에 대해 걱정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클라인한스는 "왜 EU가 수십억유로를 보조금으로 지급해 가며 전세계 반도체 위탁생산기지가 되려 하는지 궁금하다. 이는 반도체 가치사슬 중 진입장벽이 가장 높은 부문이자 가장 많은 보조금이 들어가는 부문이며 성공 가능성이 가장 적은 부문"이라고 지적했다.

미국과의 공동전선

반도체 기업 일부 경영진들은 EU가 무엇을 달성하고자 하는지 스스로 고민해야 한다고 본다. 공급망 회복탄력성을 늘리자는 차원인지, 기술적 주권과 국가안보 보호 차원인지, 아니면 기업 경쟁력 제고 차원인지 모호하다는 것.

유럽의 한 반도체기업 CEO는 FT에 "EU가 해결하겠다고 한 문제란 무엇인가. 뒷마당에 공장을 갖는 것인가"라며 "가정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공급망 리스크를 상쇄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반도체 제조 부문에 거액을 투자했지만, 단지 공장을 옮겨온다고 해결될 일이 아님을 깨달는 것"이라고 말했다.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 채드 바운 선임연구원은 "EU는 대처하려는 문제가 정확히 무엇인지 확실히 해야 한다"며 "글로벌 공급망을 다각화하겠다는 목적이라면 EU의 현 프로세스는 아주 어수선한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게다가 전세계 정부가 반도체 분야에 거액의 보조금을 집중 투하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EU가 고려할 핵심 우선순위는 미국정부와 더 강력한 공동전선을 구축하는 것이다. 여기엔 연구개발은 물론 미국의 수출통제 체제도 포함된다"고 말했다.

EU는 중국의 반도체 산업을 막으려는 전임 트럼프행정부의 독단적 조치로 큰 피해를 입었다. 바운 연구원은 "미국정부가 국가안보 위협을 독단적으로 정의하도록 내버려두지 말고 유럽도 그 과정에 동참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EU와 미국은 지난달 브뤼셀 정상회담에서 반도체 글로벌 공급망의 재균형을 목표로 연합전선을 구축하기로 했다.

EU 고위관료들은 "반도체 공동전선이 바이든행정부와의 대화에서 가장 먼저, 가장 중요하게 논의된 사안"이라며 "광범위한 기기들에 들어갈 반도체 수요가 급속히 커질 것을 고려하면, 유럽 역시 글로벌 칩제조 분야에서 존재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칩제조 프로세스에서 활용되는 최고품질의 리소크래피 장비를 생산하는 네덜란드 ASML의 CEO 페테르 베닝크도 그 의견에 동의한다.

그는 "우리는 반도체 시장이 10년 내 2배가 될 것으로 본다. 조달러 규모의 시장이 된다. 미국과 EU는 그동안 반도체 분야에 무관심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다. 전세계에서 대만과 한국, 중국 3곳에만 그와 같은 사업을 구축하게 두는 건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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