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 포커스 | 국회의원이 '사직'한다는 것

권력 저항하거나 결백 주장하거나 … 결국 '철회·폐기' 관행

2021-08-27 11:28:51 게재

정세균 천정배 최문순 등 "언론악법 막지 못했다" 사직

'보여주기' 치중 … 비리 연루된 경우엔 '처리'하기도

국회 "관행으로 원내대표와 조율, 해당 정당 의지 중요"

입조처 "국민신뢰 저하" … 미국선 '사직서 제출'로 종결

국회의원 사직서는 절반 이상이 본회의에서 통과되거나 국회의장이 허가하는 방식으로 수리됐다. 이같은 사직서의 대부분은 장관, 청와대 참모 등으로 행정부로 들어가거나 대선, 지방선거에 출마하기 위한 사직의 경우였다. 폐기되거나 철회된 사직서는 선거에 나가기 위해 제출했다가 낙선되거나 자신의 정치적 신념이나 결의를 보여주고 비리에 대한 결백을 주장하기 위한 정치적 행위였다.
윤희숙 의원 만류하는 이준석 대표 │부친의 농지법 위반 의혹이 제기된 국민의힘 윤희숙 의원이 25일 소통관에서 의원직 사퇴 및 대선 불출마 선언 기자회견에 나서자 이준석 대표가 기자회견장으로 찾아와 윤 의원을 만류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연합뉴스 안정원 기자


27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과 국회 입법조사처에 따르면 1996년 5월 30일에 문을 연 15대 국회이후 현재까지 국회의장에게 제출된 국회의원 사직서는 모두 91건이었다. 16대국회와 18대 국회에 21개씩의 사직서가 나왔다. 19대 16개, 15대 13개, 20대 10개의 사직서가 제출됐다. 21대 사직서 제출 의원은 김진애 전 의원과 윤희숙 의원 등 2명이다.

이중 20개가 본회의에서 국회의원들의 동의를 거쳐 처리됐고 27명에 대해서는 국회의장의 허가로 수용됐다. 모두 47개가 사직처리된 셈이다. 이는 전체 91건의 절반을 넘는 규모다. 폐기된 게 33건이고 10건은 스스로 철회됐다.

20대 국회에서는 안철수 대표가 2017년 대통령 선거 출마를 위해 제출한 사직서가 당일 국회의장의 허가를 받아 수리됐다. 19대때 박근혜 전 대통령이 대통령선거를 이유로 제출한 사직서가 국회 본회의 표결절차를 거쳐 한 달 반 만에 처리된 것과 다소 다른 모습이었다.

이상돈 전 의원은 페이스북에 "지역구 의원이 사퇴하려면 비회기중에 의장한테 사표를 내는 것이 편하다. 그러면 의장은 일단 반려한 후에 목이기는 척하고 재가를 하는 것이 보통"이라며 "2017년 대선을 앞두고 안철수 후보가 의원직을 사퇴했는데 의원들과는 논의도 없이 사퇴서를 내서 놀랐고 정세균 의장이 신속하게 사표를 수리해서 또한번 놀랐다"고 했다.

비례대표 의원이 장관이나 청와대 참모로 이동할 때는 장관직을 그만두고 가는 게 관행이다.

자신의 소신을 밝히는 데도 사직서가 많이 활용됐다. 19대때 김용익의원은 기초연금법 처리에 반대하며 사직서를 던졌다. 이 사직서는 임기말 폐기됐다. 18대에서는 환경운동가 출신인 유원일 의원이 '한나라당의 4대강 사업예산 날치기를 막지 못한 책임을 통감한다'며 사직의사를 밝혔다. 이 사직서도 폐기됐다. 장세환(헌재의 언론악법 관련 부당한 재판 항의), 천정배(폭정과 언론악법 강행처리 항거), 정세균(의회민주주의 존중하지 않은 국회에서 의원 본분 수행 불가능), 최문순(언론관계법 막지 못한 사유) 의원 등도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 사직서들은 모두 스스로 철회됐다.

사회적 문제와 연결돼 사직서를 낸 의원들도 있다. 18대땐 개인정보 침해 의혹 등의 이유로 강용석 의원이 임기말쯤인 2012년 2월 29일에 사직서를 제출했지만 5월 29일 임기만료와 함께 폐기됐다.

19대엔 성폭력 혐의를 받은 심학봉 의원이 사직서를 내고 당일날 본회의에서 217명의 찬성으로 가결돼 의원직을 잃었다. 20대땐 엘시티비리에 연루된 배광덕 의원의 사직서는 의장허가로 수리됐다. 미투 의혹에 연루된 민병두 의원은 2018년 3월 12일에 결백을 주장하며 의원직 사직서를 제출했지만 5월 4일 철회했다.

우리나라는 의원 사직서의 경우 회기중엔 본회의 의결로, 폐회 중엔 국회의장 허가로 처리된다. 일본 의회와 비슷하다. 미국 의회는 사직서를 제출하면 곧바로 의원직이 상실된다.

윤희숙 국민의힘 의원은 25일 제출한 사직서와 관련 '저항'의지를 보였다. 부친의 세종시 토지 매입이 부동산 투기의혹(농지법 위반혐의)으로 번지면서 권익위로부터 수사의뢰를 받자 내린 '극약처방'이었다. 윤 의원은 "야당 의원의 평판을 흠집내려는 의도"라며 국민 권익위를 비판했다.

8월 국회가 끝나더라도 12월 9일까지는 정기국회가 이어져 본회의 의결없이는 사직서 수리가 어려울 전망이다. 국회 핵심관계자는 "국회의원이 사직서를 내더라도 당 대표나 원내 대표 등 당의 의견을 들어 처리한다"면서 "현재 야당 대표나 원내대표가 윤 의원의 사직의사를 그대로 수용해 처리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박병석 국회의장 입장에서도 윤 의원의 불법 행위가 드러나지 않은 데다 정책 비판의미가 가미된 사직서를 처리하는 데에 부담스러울 밖에 없다. 윤 의원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직서를 놓고 국회 본회의에서 여야가 표결전을 붙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얘기다. 다만 윤 의원이 '국회 업무 거부' 등으로 사실상 국회의원 활동을 중단할 정도로 강력한 사직의사를 보인다면 불가피하게 사직 표결에 들어갈 수도 있다.

입법조사처는 2011년 '국회의원 사직관련 쟁점과 해외사례'보고서를 통해 "정치적 반대 또는 항의의 표시로 의원 사직서를 제출하고, 이것이 처리되지 않은 채 유야무야 넘어가는 경우가 반복되면 국회의원의 정치적 책임성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손상될 수밖에 없다"면서 "국회의원은 사직서 제출 시 국회는 본회의에서 처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래야 국회의원으로서 자신의 말과 행동에 책임을 지는 모습을 국민에게 보여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박준규 기자 jkpark@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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