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상인 '독특한 위험관리방식' 채무불이행·파산 막아

2021-09-10 11:59:06 게재

"편집증에 가까울 만큼 현금흐름 체크"

전성호 교수 '개성자본회계론' 출간

"개성상인 일기장에는 매번 16번째 기입 뒤, 반드시 현금흐름을 체크하는 '시재' (현재 가진 돈이나 곡식) 표시가 편집증에 가까울 정도로 반복되고 있다."

전성호 한국학중앙연구원 글로벌한국학부 교수는 최근 발간한 '개성자본회계론'에서 개성상인의 위험관리방식을 강조했다. 전 교수는 개성상인 자본회계의 특성인 위험예방 면역관리체계를 설명하기 위해 '개성회계 편집증'(KAP)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었다.

◆"근대 자본주의 원류 한반도에서 비롯" = 회계학의 근간인 복식부기(DEB)는 그동안 13세기 이탈리아 베네치아 상인이 작성한 거래원장에서 유래됐다고 알려졌지만 개성상인들은 그보다 200년 앞선 고려시대에 복식부기를 사용해왔다. 전 교수는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세계가 놀란 개성회계의 비밀'(2018년)을 발간한 이후 보다 심도 있게 개성상인의 회계를 분석한 개성자본회계론을 발간했다.

개성자본회계론은 개성상인의 회계장부에 등장하는 이두문자를 신채호의 역사이론에 적용, 오늘날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에서 하얼빈 아사달과 중경 송도를 연결해 근대 자본주의의 원류는 서구 유럽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실질적으로 입증했다. 개성의 다른 이름이 중경인데, 신채호는 지금의 동북쪽에 있는 개평현 안시 고허 '아리타'가 중경이라 주장하고 있다. 북부여의 서울이 '아스라'이고, 지금의 러시아 우수리는 곧 '아스라'의 이름이 그대로 전해졌다는 해석을 하고 있다.

또한 전 교수는 개성상인들의 복식부기(KDEB)를 단순한 회계제도로 보지 않고 자본주의 생성과 발전에 필요한 근본적인 요소로 분석·평가했다.

전 교수는 "KAP를 통해 개성상인은 한 번도 회계오류로 인한 채무불이행이나 신용의 파산을 경험하지 않았다"며 "개성상인들이 매일 새벽에 일어나 KAP를 체크한 이유는 기업실체의 현금흐름을 자기 신체의 혈액순환처럼 인식해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위험을 방지해야 할 필요성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KAP는 고려시대 이후로 천년의 역사 속에서 생존해온 개성상인들의 DNA에 박힌 미래의 불확실성을 완전 투명한 확실성으로 전환시키는 위험관리 면역시스템"이라고 말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국가권력이 이동하면서 개성상인들이 위험해졌을 때 그들을 도울 국가권력이나 금융권력, 보험권력이 없어졌기 때문에 스스로 어떠한 위험이 도래해도 극복할 수 있는 면역체계로 DEB를 개발한 것이 바로 KAP라는 설명이다.

전 교수는 고려시대의 문예부흥에 기반한 KDEB가 기존의 유럽 중심 자본주의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은행 없는 회계장부상의 자본 금융시스템'을 탄생시켰다고 역설했다. 이를 '회계장부상 가상의 은행계정을 통한 개성발 금융혁명'이라고 정의했다.

◆고려 개성발 금융혁명 = 12세기 송 황제가 파견해 고려를 방문한 서긍은 고려에 송나라와 동일한 도량형과 동일한 회계단위가 확립돼 있는 것을 보고 찬탄하면서 송 황제에게 '동문의 중화를 이룬 곳이 바로 고려'라고 보고했다. 전 교수는 "쉽게 이야기해서 통화와 회계 네트워크 외부성의 표준 체계의 최정상에 고려가 있었다는 말"이라고 설명했다.

오늘날 국가와 국가 사이의 송금 등 금전거래를 노트북을 사용해 인터넷상으로 진행하듯이, 환어음이나 우편환 같이 종이 위에 글쓰기로 지급을 유예하는 전통적인 방식이 고려와 송나라 사이에서 발달한 국제결제망이었다. 두 국가는 전자적인 온라인 지불시스템 페이팔을 연상케 하는 '날아다니는 돈'(비전)을 발행해 국제통화로 사용했다.

구리화폐인 '전문'은 중세 이래 가장 많은 인구가 결제활동을 수행한 한자문화권의 통화 및 회계단위였다. 전 교수는 "KDEB '전문'이야말로 중세 이래 미국의 달러가 세계 기축화폐로 등장하기 이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경제활동을 수행하기 위해 사용한 통화"라고 말했다.

서구의 자본주의는 금화와 은화가 소수에 의해 독점되고 궁정과 로마교황청 등 일부 지역에 한정돼 통용돼 온 소수 지배자의 통화역사를 갖는 것에 비해, 고려시대는 폭넓게 보편적으로 사용되면서 중앙은행의 독립성와 화폐의 중립성을 갖고 있었다는 게 전 교수의 설명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화폐에 당대 정치적 파워의 상징인 황제의 얼굴이나 연호를 새긴 것과 달리 고려와 조선은 화폐를 주조할 때 권력자를 배제하고 정치권력으로 독립된 국호를 새겼다는 것이다.

◆권력자 배제한 화폐, 회계장부상 분산계정 = 전 교수는 "개성발 금융혁명을 일으킬 수 있었던 이유는 외부에 존재하는 중앙집중식 은행의 매개 없이 회계장부상의 분산된 계정시스템으로 이뤄지는 자본 금융시스템 때문"이라며 "분산된 계정시스템은 천년의 역사를 관통해온 안정된 통화단위이자 회계단위인 '전문'의 성립 없이는 불가능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소수의 이해관계자 자본소유자 중심의 재무제표가 종업원, 중간관리인, 최고경영자뿐만 아니라 기관투자자, 연금가입자 등 다수의 이해관계자가 회계정보에 민감해지는 '회계의 사회민주화'가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는 오늘날, 개성자본회계 순환론이 우리에게 던지는 시대적인 의의는 매우 크다"고 강조했다.

전 교수는 또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한국이 식민지를 경험하면서 유럽에서 발달한 산업혁명의 결과물들이 일본을 통해 타율적으로 도입됨에 따라 경제체제의 유지에 가장 필수적인 요소인 정직성과 근면성을 상실했다는 회계사학계의 지적에 대해 한국의 경제사학계는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DEB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 없이 18~20세기 유럽에서 형성된 근대성을 이해할 경우 회계를 단순히 자본 축적이나 부를 계산하는 도구 정도로 오해하고 물질만능의 얼빠진 자본주의를 추구하기 쉽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전 교수는 성균관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박사학위를 받은 뒤 옥스퍼드대학교에서 박사후연구원, 네덜란드 국제사회사연구원에서 초빙연구원, 독일 프랑크푸르트 괴테대학에서 객원교수를 역임했다. 국내 인문사회과학분야 최초로 미국과학재단(NSF)과 독일연구재단(GRF)에서 연구비 지원을 받았다.

또한 케임브리지대학 출판부는 전 교수를 '케임브리지 한국사 전집' 조선경제사 분야 공동저자로 위촉하기도 했다.

이경기 기자 celli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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