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텔, MS처럼 변신에 성공할 수 있을까

2021-09-13 11:13:55 게재

이코노미스트지 "오만과 고립주의의 인텔, 창업자 앤디 그로브의 정신 되살리느냐 관건"

2014년 사티아 나델라가 마이크로소프트(MS) 최고경영자가 됐을 때, 그는 자사 주력제품 '윈도우'를 개방하기 시작했다. 핵심 사업을 외부세계와 단절시킨 전임자들과 달리, 나델라는 운영체제를 경쟁의 흐름에 맡겼다. 윈도우에서만 독점적으로 실행되던 MS의 프로그램들은 이제 다른 운영체제에서도 실행가능하다. MS가 한때 '암적 존재'라 불렀던 오픈소스 경쟁기업 리눅스에서도 구동된다. 그같은 결정으로 MS의 소프트웨어 시장은 확대됐다.

그리고 다른 운영체제와 보다 평등한 조건으로 경쟁하면서 윈도우는 크게 개선됐다. 그 과정에서 MS의 문화가 바뀌었다. '끔찍한 독점주의자'라는 오명을 벗게 되면서 시가총액이 2조달러를 넘어섰다.

영국 이코노미스트 최신호는 "무적의 '윈텔'(Wintel, 인텔 반도체를 탑재하고 윈도우 소프트웨어로 구동되는 컴퓨터) 연합이라 불렸던 다른 한 기업이 이제 MS의 길을 따르려 한다"며 "MS가 운영체제에서 그랬던 것처럼, 미국의 거대 반도체 기업 인텔 역시 오랫동안 핵심사업을 폐쇄적으로 운용했다. 그러다 수년 동안 신제품 출시가 지연됐고 엉뚱한 기술에 베팅한 끝에 경영진이 교체되는 등 어수선한 시기를 겪었다"고 전했다.

이코노미스트지에 따르면 MS와 인텔이 기술업계의 각기 다른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구조적 측면에선 사실 쌍둥이였다. MS의 윈도우와 오피스가 상호 최적화된 것처럼, 인텔 역시 자체적인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설계하고 이에 최적화된 제조공장에서 생산했다. 기술 부문이 점차 커지고 다양해지면서 한때 지배적인 모델이었던 '종합반도체기업'(IDM)의 경쟁력은 약화됐다. 다른 기술적 생태계가 등장하면서 MS의 수직통합이 걸림돌이 된 것과 비슷했다. 또 MS와 마찬가지로 인텔은 오만했고 고립주의를 고집했다. 다른 반도체제조사들은 인텔과 협력하는 것을 단념하고 자체적인 밭을 일궜다. 칩 설계에선 AMD와 Arm, 엔비디아, 퀄컴 등이, 반도체 제조에선 TSMC 등이 두각을 나타냈다.


윈텔연합 한 곳은 탈바꿈, 다른 한곳은?

인텔은 MS보다 더 오래 고립주의를 유지할 수 있었다. 클라우드컴퓨팅 사업의 호황 덕분이었다. 인텔의 'x86아키텍처'처럼 값비싼 최고급 사양 프로세서의 수요가 급증했다. 데이터센터의 서버를 구동시키는 프로세서다. 이 부문은 지난해 인텔 총매출 780억달러의 1/3을, 순이익 210억달러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하지만 인텔은 이제 Arm과 같은 개방형 시스템에 압도당하고 있다. Arm의 칩설계 청사진은 전세계 대부분의 스마트폰에서 사용된다. 이는 인텔이 놓친 시장이다. 데이터센터 분야에서도 그같은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엔비디아는 지난해 Arm을 400억달러에 인수했다. TSMC와 엔비디아는 매출과 이익 측면에선 인텔보다 낮지만, 시가총액 측면에선 인텔의 2배 이상을 자랑한다.

인텔의 신임 CEO 팻 겔싱어는 "다른 반도체제조사의 프로세서를 생산하는 파운드리 서비스를 통해 우리의 프로세스와 제조력, 지적재산권 모두를 전세계가 이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단언했다.

그는 2009년까지 인텔의 최고기술경영자였다가 축출됐다. 그리고 반도체가 아닌 소프트웨어 제조사 'VM웨어'의 CEO를 지냈다. 스스로 '10년간의 휴식'이라 평가한 기간이다. 인텔 CEO로 복귀하자마자 그는 '인텔을 파운드리와 반도체설계로 분리할 것'이라는 세간의 예상을 뒤집고 '종합반도체기업(IDM) 2.0 전략'으로 통합에 더욱 매진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IDM을 인텔의 경쟁력으로 보고 있다. '뉴스트리트리서치'의 피에르 페라구도 "독립 파운드리 자회사로 TSMC와 경쟁하기엔 무리"라며 "인텔의 제조단가는 TSMC보다 70% 높다"고 지적했다.

대신 인텔은 일종의 가상 디커플링을 택했다. 일단 TSMC 등 외부의 파운드리기업을 보다 많이 활용할 방침이다. 비용을 줄이는 한편 TSMC의 최첨단 제조 프로세스를 배우는 목적도 있다. 올 7월 겔싱어는 "인텔은 최고사양 반도체를 만드는 능력 측면에서 TSMC와 한국의 삼성전자를 따라잡을 목표를 갖고 있다"고 밝혔다. 최소한 1년에 하나씩 최고사양 프로세서를 새롭게 출시하는 게 그의 야심찬 계획이다. 인텔이 2025년쯤 경쟁자들을 다시 앞설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동시에 인텔은 자체 파운드리 사업부문인 '인텔 파운드리 서비스'(IFS)를 다시 출범시켜 자사의 칩 제조력을 다른 기업들에게 제공할 계획이다. 이 계획은 2012년부터 반복적으로 공표됐지만 실제 가동에 들어가진 않았다. 이번엔 IFS가 자체적인 손익계산 보고서를 갖추게 될 전망이다. 인텔은 또 애리조나주에 200억달러를 들여 최소한 두개의 새로운 제조공장을 지을 계획이다. 겔싱어는 최근 자신의 새로운 전략을 설명하고 촉진하기 위해 글로벌 투어를 떠났다. 그는 지난 7일 독일 뮌헨의 한 무역박람회에서 "인텔이 유럽에 두개의 새로운 제조공장을 지을 것"이라고 공언했다.

올해 초 겔싱어 취임을 계기로 급등한 인텔 주가는 이후 다시 급락해 그가 지명되기 전 수준으로 되돌아갔다. 투자자들은 그에게 두가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인텔이 그 전략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가, 그 전략은 언제 이익으로 현실화하는가다.

"편집광만이 살아남는다"

그 대답은 인텔이 환골탈태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는 지적이다. 겔싱어는 이를 인텔 명예회장을 지낸 고 앤디 그로브의 정신을 되살릴 수 있느냐로 보고 있다. 그로브는 "편집광만이 살아남는다"는 말로 유명한 인텔의 전설적인 공동창업자다.

결국 이는 인텔이 고립주의를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인텔 수석 부사장 겸 기술 개발 부문 총괄인 앤 켈러허는 "우리는 기존과는 다른 종류의 근육을 써야 할 필요가 있다"며 "외부 고객사와 어떻게 협력하는지, 다른 기업이 만든 도구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배워야만 한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오류 없는 실행이다. 최첨단 칩 제조엔 약 700개의 복잡한 공정이 연관돼 있다. 나노(10억분의 1m) 크기 레이어에 설계 청사진을 인쇄하고 각각의 층을 에칭(식각)해야 한다. 인텔은 또 '최첨단 극자외선 반도체 인쇄 기술'(EUVL)을 마스터해야 한다. TSMC와 삼성전자 등이 이미 눈부신 효율성을 자랑하는 지점이다. 인텔은 지난 6월 말 차세대 서버 프로세서 양산을 몇달 간 연기할 것이라고 밝혔다. EUVL이 쉽사리 달성될 수 없다는 점을 시사한다.

IFS 역시 힘겨운 도전과제에 직면했다. 반도체 애널리스트들은 '인텔 파운드리가 TSMC와 경쟁하기 어렵다'는 뉴스트리트리서치의 페라구의 말에 동의한다. 비용과 규모, 기술적 뒤처짐 등의 문제만 있는 게 아니다. 인텔은 자사 고객들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IDM과 파운드리 모두를 추구하게 되면 이해관계 충돌이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의 스자오웨이 교수는 "향후 반도체는 계속 부족해질 전망이다. 인텔은 자체 프로세서 제조에 자원을 할당하느냐, 아니면 파운드리 고객과의 계약사업을 존중해 이를 할당하느냐를 결정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텔은 파운드리 부문에서 수익성 높은 틈새시장을 발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인텔은 '글로벌파운드리'를 인수해 파운드리를 강화하는 데 관심이 크다. 이 회사는 2009년 AMD에서 분사한 기업으로, 현재 아랍에미리트(UAE) 국부펀드가 소유하고 있다. 현재 인수협상은 중단된 상황이다. 글로벌파운드리는 지난달 기업공개를 위한 작업에 나섰다. 이코노미스트지는 "하지만 글로벌파운드리가 다른 투자자들의 이해관계를 타진하고, 가능한 몸값을 산정한 뒤에는 인텔과의 협상이 재개될 가능성이 크다"고 전했다.

글로벌파운드리를 품든 아니든, 인텔은 새로운 개방 정신을 약속하고 있다. 고객사의 칩을 설계하면서 자사의 전매특허 도구만 사용할 것을 강요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더 중요한 건 고객사에게 자사의 반도체 설계나 패키징 기술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는 점이다. 아마존웹서비스(AWS) 등 클라우드 기업들은 자사의 데이터센터를 최적화하기 위해 단일한 칩 위에 인텔 서버 프로세서의 설계와 다른 기업들의 설계를 동시에 연계할 수 있게 된다. 컨설팅기업 린리그룹의 수석애널리스트 린리 그웬냅은 "목적에 따라 칩을 다르게 짜맞출 수 있는 맞춤형 설계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AWS와 퀄컴은 IFS의 첫번째 고객이 될 전망이다.

인텔에 대한 미국 내 기대감과 압력도 커지고 있다. 미국 정치인들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반도체 부족 상황 △중국의 무서운 반도체 굴기 △대만에 대한 중국의 위협 등을 이유로 대부분의 반도체가 아시아에서 만들어지는 상황을 걱정하고 있다. 미 의회는 곧 반도체 부문에 대한 520억달러 보조금 정책을 승인할 것으로 예상된다. 유럽연합(EU) 역시 반도체 관련 야심찬 계획을 짜고 있다.

인텔 겔싱어 역시 "아시아에 새로운 제조공장을 짓게 되면 타 지역 대비 30~40% 비용이 저렴할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하지만 반도체 부문에 대한 미 정부의 보조금은 우리에게 미국 내에 더 많이, 더 빨리 투자하라는 의미"라고 말했다.

이는 국가안보를 우려하는 고객들에게 어필하는 발언이다. 미국 국방부는 최근 인텔의 미국 내 파운드리를 활용하기로 결정했다. 증권사 번스타인의 스테이시 라스곤은 "정부의 지원금을 끌어들이는 것이 사실 인텔 파운드리의 주요 존재이유"라고 말했다. 이코노미스트지는 "하지만 국가보조금에 의존하게 되면 겔싱어가 달성하고자 하는 바로 그 경쟁력이 무뎌질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 반도체 산업 부활에 걸린 이해관계는 매우 높다. 이는 인텔에게 한정된 것만은 아니다. 인텔이 계속 경쟁력을 잃는다면, 반도체 업계 인수합병이 줄을 이을 전망이다. 또 몇 안되는 거대 반도체제조사들의 시장이 결국 TSMC와 삼성전자의 복점으로 더욱 집중될 수 있다. 그보다 많은 기업들이 살아남는다고 해도, 대부분의 제조공장은 아시아에 위치할 가능성이 크다. 겔싱어는 전세계 반도체 제조능력의 약 80%가 아시아에 있다고 추산한다. 미국은 약 15%, 유럽이 나머지를 차지한다.

이코노미스트지는 "인텔의 개방전략이 성공한다면, 6000억달러 규모의 반도체 시장에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 수 있다"면서도 "실패할 경우 단기적으로는 반도체 부족의 심화, 장기적으로는 아시아의 반도체 산업 지배가 강화되면서 각종 지정학적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고 전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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