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누구를 위한 국민연금 대표소송 반대인가
1998년 소액주주들은 뇌물공여, 계열사 부당 지원 등으로 회사에 손해를 입힌 S전자 전·현직 이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오랜 법정 공방 끝에 소액주주들이 일부 승소해 회사는 이사들로부터 190억원을 배상받았다.
2003년에는 소액주주들이 L화학 전·현직 이사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회사 자산을 지배주주 일가에게 헐값으로 넘겼기 때문이다. 소액주주들의 승소로 L전자는 400억원을 배상받았다. 2008년에는 계열사 부당 지원에 가담한 H자동차의 전·현직 이사들이 피소되었다. 소액주주들의 일부승소로 H자동차는 무려 826억원을 되돌려 받았다.
이게 바로 주주대표소송(이하 '대표소송')이다. 즉, 회사가 제3자에게 손해배상을 하는 것이 아니라 회사에 손해를 끼친 이사들로부터 배상을 받는 것이 대표소송이다. 한마디로 말해 대표소송은 회사를 위한 소송인 것이다. 또, 이 소송이 활발히 이루어져 위법행위에 대한 억지력까지 갖게 되면 해당 회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자본시장 발전에도 기여할 수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상장회사에 대한 대표소송은 지금까지 1년에 평균 2개꼴로 제기되었다. 기관투자자들이 나서지 않는 상황에서 개인 주주들만으로 소 제기에 필요한 지분요건을 갖추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2000년대 초반부터 국민연금이 대표소송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사회적 합의에 도달하는 데는 상당히 긴 시간이 필요했다.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가 수탁자책임에 관한 원칙를 채택한 2018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대표소송를 제기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었고, 이에 대한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은 2019년 1월에 채택되었다. 하지만 국민연금의 대표소송 제기는 계속 미루어졌고, 이에 대한 비판이 일자 작년에는 연내에 소송을 제기하겠다고까지 공언했으나 끝내 성사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이달 들어서는 재계가 갑자기 국민연금 대표소송에 반대하는 여론몰이를 하고 있다. 작년 12월에 보건복지부가 대표소송 관련 가이드라인을 재정비하는 안건을 기금운용위원회에 상정했고, 기금운용본부가 주주가치 훼손 관련 사건의 정확한 사실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관련 회사들에 비공개 서한을 발송한 것이 발단이 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재계가 주장하는 반론들은 2018년 수탁자책임에 관한 원칙을 채택하기 이전에 이미 충분히 논의된 사안들일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을 살펴보면 사실 왜곡으로 일관되어 있다.
재계는 정부나 노동계·시민단체 출신의 수탁자책임위원회(이하 '수책위') 위원들의 입김을 우려한다. 하지만 이건 수책위의 구성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정부 위원은 아예 없고, 사용자 단체, 근로자 단체, 지역가입자 단체가 추천한 위원들이 각각 3명씩 포진하고 있어서 특정 단체가 의사결정을 주도할 수 없는 구조다. 참고로 지역가입자단체 추천위원 중에는 시민단체 출신이 단 한 명도 없다.
재계는 수책위 위원들의 전문성을 트집 잡는다. 하지만 위원 9인 중 3인은 상근직이며 모든 위원이 국민연금법 시행령에 따른 전문성 요건을 갖추고 있다. 또, 12월에 상정한 안건에 따라 수책위가 소송 제기의 최종 주체가 되더라도 기금운용본부가 의사결정과정에서 배제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또, 공개 중점관리기업 선정 등 다른 주주권행사와의 일관성 확보 차원에서도 수책위가 최종 결정 권한을 갖는 것이 합당하다. 대표성이 없는 기금운용본부가 수책위 승인도 없이 단독으로 소송 제기를 결정할 수 있는 지금의 구조는 시급히 시정되어야 한다.
재계는 대표소송이 기업을 벌주는 것이고 기업 활동을 위축시켜 수익률을 떨어뜨릴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앞서 강조한 것처럼 대표소송은 기업을 해하는 소송이 아니라 오히려 기업을 위한 소송이고, 기업 활동을 위축시키는 소송이 아니라 정도 경영을 유도하는 소송이다.
또, 재계는 패소에 따른 소송 비용을 걱정하는데 대표소송은 재산권을 목적으로 하는 소송이 아니기 때문에 패소하더라도 원고가 물어주어야 하는 상대방 변호사 보수 상한은 고작 740만원에 불과하다. 900조를 운용하는 국민연금이 걱정할 수준의 비용이 전혀 아니다.
그럼 재계는 도대체 왜 사실을 왜곡하면서까지 필사적으로 국민연금의 대표소송을 반대하는가? 그 답은 명백하다. 그동안 회사에 손해를 끼친 부도덕한 임원들을 비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국민연금이 하루속히 대표소송을 제기할 또 하나의 이유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