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청소년, 법정대리인 통지 없이 경찰에 신고할 수 있어야"

2022-02-22 12:01:15 게재

'법정대리 통지' 경찰 지침, 권리구제에 걸림돌

경찰 "성범죄 피해 신고 꺼리는 부작용 알아"

#지난해 17세 청소년은 강간 피해를 거주지 인근 경찰서에 신고하러 갔다가 '신고 접수 후 부모님에게 사건 관련해 통지한다'는 담당 수사관의 안내를 듣게 됐다. 피해 청소년은 '부모님이 알게 되면 신고하고 싶지 않다'며 신고를 진행하지 않고 성폭력상담소에 연락했다. 상담원은 경찰서에 방문해 일단 사건 관련 증거채취가 시급하니 신고는 접수하되 보호자 고지를 최대한 미뤄달라고 양해를 구했다. 다음 날 변호사 동행 하에 진술을 위해 경찰서에 방문했지만 경찰에선 법정대리인 통지 의무를 언급했다. 이날 피해자는 결국 진술을 하지 못했다. 2~3주 후 경찰서에서 보호자 통지를 안 하는 방향으로 하겠다고 연락을 했지만 피해자는 이미 신고를 포기한 상태였다.

성범죄 피해 아동·청소년이 피해 사실 신고 시 부모 등 보호자에게 의무적으로 통지하도록 한 경찰 지침 때문에 신고 자체를 포기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피해자 지원단체와 법조계에서는 해당 지침을 시급히 개정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22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에서 열린 '성범죄 피해 아동·청소년 최상의 이익을 고려하는 수사절차 개선을 위한 토론회'에선 경찰 지침 때문에 실제로 경찰 신고를 포기하는 사례가 발표됐다.

권현정 탁틴내일아동청소년 성폭력상담소 부소장이 공개한 사례를 보면 17세 청소년 사례 외에도 역시 강간 피해를 입은 후 경찰에 신고하려 했지만 보호자 통지가 필수라는 사실을 알게 돼 신고를 포기한 또다른 청소년의 사례도 있었다. 이 청소년은 과거에 아버지로부터 가정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어 부모에 대한 신뢰가 크지 않은 상태였고, 어머니도 아버지에게 동조하는 편이라 부모가 자신을 도와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이 청소년은 신고를 포기해 자신의 강간피해에 대한 권리 구제를 받지 못하게 됐다.

권 부소장은 "아동·청소년이 성범죄 피해를 신고할 때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부모나 친권자 등 법정대리인에게 알리고 지지와 지원을 받는 것이 이상적이지만 현실에서는 이런 원칙이 적용되기 어려운 상황이 많다"면서 "피해 아동·청소년들은 피해에 대한 법정대리인의 반응을 우려해 알리지 않고 신고하고 싶어 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경찰 신고 과정에서 법정대리인에게 피해사실이 통지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신고와 지원을 포기하곤 한다. 권 부소장은 "신고는 피해에 대한 권리구제 과정일 뿐 아니라 범죄를 중단시키는 효과가 있는데 경찰 이야기에 피해자가 신고를 포기하고, 가해자에게 피해를 지속적으로 입는 상황이 발생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권 부소장에 따르면 기존 경찰청 범죄수사규칙(경찰청 훈령)에는 보호자에게 연락하는 것이 피해자의 복리상 부적당하다고 인정될 때에는 연락하지 않을 수 있다는 예외규정이 있었다. 그러나 지난해 1월 규칙이 개정되면서 해당 내용이 삭제됐다. 지난해 1월부터 시행되고 있는 경찰청 범죄수사규칙 제13조를 보면 범죄 가해자 또는 피의자가 법정대리인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미성년자의 범죄피해 사실 등을 법정대리인에게 통지하도록 했다.

이같은 경찰청 범죄수사규칙이 상위 법령을 위배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조윤희 변호사(공동법률사무소 이채)는 이날 토론회에서 "형사소송법에 따르면 고소인이나 피해자가 통지를 원하지 않거나 통지하는 것이 사건관계인의 명예나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거나 사건관계인에 대한 2차 피해를 발생시킬 우려가 있는 경우 등에는 통지하지 않는다고 하고 있다"면서 "피해자의 의사 또는 2차 피해 등 발생에 관련해 예외를 두지 않고 법정대리인에게 수사상황 등을 통지하도록 하는 경찰청 범죄수사규칙은 상위 법령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권 부소장은 "피해 아동청소년이 법정대리인 통지 없이 신고할 수 있도록 범죄수사규칙 개정이 시급하다"면서 "아동·청소년의 최상의 이익은 법정대리인이 피해 아동청소년의 보호자가 되어야 하지만 예외적 상황에서 법정대리인을 대신할 수 있는 보호자를 명시하여 권리 구제 과정을 진행할 수 있도록 최선의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경찰도 규칙 개정 필요성에 공감하는 입장을 밝혔다. 선미화 경찰청 성범죄수사과 계장은 토론회에서 "규정에 따르면 경찰관은 미성년자인 피해 아동·청소년에 대해 법정대리인·배우자·직계친족·형제자매 또는 가족에게 통지하여야 하며, 현장 수사관들은 대부분 직계친족인 부모에게 통지를 진행하게 된다"면서 "다만 경찰 또한 보호자에 대한 통지 규정으로 인해 피해 아동·청소년이 신고를 꺼린다는 내용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으며, 현재 피해자에 대한 수사 진행 통지 규정 중 범죄수사규칙 제13조 등 관련 규정들의 개정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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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선 기자 egoh@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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