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한국형 협치'다│⑥ DJP연합의 교훈

'정권창출' 목표엔 성공 … 핵심 약속 '내각제' 깨지면서 붕괴

2022-03-24 11:45:19 게재

대북정책 등 공감대 확보에도 실패

책임총리 실험, 공동정부 첫 사례

"대통령제에서 어려운 연정·연합"

1997년 15대 대선을 45일 앞두고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총재와 김종필 자유민주연합 총재가 손잡은 DJP연합은 2년 반 동안 지속하면서 결국 '절반의 성공'으로 기록됐다. '정권탈환'엔 성공했지만 '이종교배'의 한계를 이겨내지 못했다. 김대중 총재의 대통령 당선과 내각제 개헌, 김종필 총재의 집권으로 이어지는 초기의 약속이 깨진 탓이다.

24일 국회도서관 국회기록보존소에 따르면 이인제 전 의원은 15대 대선에서 3위를 기록했지만 가파른 지지율 상승세를 보여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후보와 함께 DJP연합을 '본의아니게' 부추긴 인사로 지목된다. 이 전 의원은 DJP연합에 대해 "내각제를 고리로 공동정부, 선거연대가 이뤄졌고 DJ가 대통령이 됐다"면서도 "제가 500만표를 득표하고 영남지역에서만 350만표를 얻어서 DJ가 대통령이 된 것"이라고 했다. 당시 대선 결과를 보면 김대중 후보는 1032만6275명의 지지를 얻어 40.27%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이회창 후보는 993만5718표, 38.74%로 뒤를 이었고 이인제 후보는 492만5591표로 19.20%의 득표율을 올렸다.

윤석열·안철수, 후보 단일화 선언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와 국민의당 안철수 대선 후보가 지난 3일 오전 국회 소통관에서 단일화 기자회견을 마치며 악수하고 있다. 사진 국회사진기자단


이 전 의원이 이끈 국민신당도 결국 DJP연합에 결합했다. 그는 "서로 정체성이 다르더라도 정책을 어떻게 조정을 하고 균형을 맞춘다, 인사를 어떻게 서로 나눈다, 이렇게 정책계약, 연정계약을 해서 연정을 구성하는 것 아니냐"며 "대통령제에서는 작은 쪽하고 큰 쪽하고 손을 잡으면은 아무리 공동정부라고 하더라도 (작은 쪽의) 정체성이 사라지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고는 "내각제처럼 선거 때 다시 헤어져서 선거를 치르면 정체성이 사라져 살아남을 수가 없다"면서 "그래서 JP(자민련)가 원내교섭단체에 실패하지 않았느냐"고 했다.

◆"정권교체가 대의, 정체성 달라도 빚을 갚는 노력" = 김대중 총재가 타도의 대상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면서 정적이었던 김종필 총재는 권력을 향한 목표만으로 손을 잡았다.

원혜영 전 의원은 유신세력과 연대라는 평가를 받는 DJP연합에 "기본적으로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면서도 "가장 큰 대의인 평화적 정권교체를 살려나가기 위해서는 맘에 안 들어도 수용하는 분위기였다"고 했다.

정세균 전 의장은 "처음으로 정권교체가 됐는데 솔직히 말하면 내가 더 나은 데 다른 저쪽(자민련) 당의 다른 사람이 입각도 하고 그런 섭섭함 있었다"면서 "그래도 DJP연합해서 정권교체 이뤘고 그렇지 않으면 정권 교체 실패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김종필 총재나 자민련 분들을 잘 대하고 존중하고 의견을 반영하는 것도 많이 했다"고 했다.

정 전 의장은 "우리와 자민련의 정체성이 좀 달라 우리가 보기엔 영 마당치않은 요구를 할 때 양보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며 "예산 편성할 때 자민련 측 위원들이 주장하는 사업에 대해서 우리가 반영하도록 측면지원도 하는 등 빚을 졌다고 생각하고 빚을 갚는 노력을 열심히 했다"고 했다.

◆정략적 결합의 한계 = 김종필 총재는 애초엔 이회창 후보와의 단일화나 연대를 검토했다고 한다. 자민련 초대 사무총장이었던 조부영 16대 국회 부의장은 "이회창 총재가 완고하고 소통의 어려움이 있었지만 주변에서는 자민련 JP와 연대해야 한다고 했고 당내 분위기도 그렇게 가는 게 좋겠다고 해서 초창기엔 많이 진척이 됐다"면서 "결론은 후보로 이회창으로 되고 DJP연합으로 이뤄진 것"이라고 했다.

DJP연합은 보수진영의 표 분산으로 대선에서 승리했고 합의대로 김종필 총리체제, 경제부처 장관의 자민련 인사 임명 등이 이뤄졌다. 하지만 1999년 7월에 내각제 개헌 포기 선언이 나오면서 큰 간격이 생겼다. 김종필 총재는 2000년 2월, 김대중정부 출범 2주년이면서 16대 총선 2달 전에 사실상 '연정 파기'를 선언했다.

연정 파기 이후 치른 총선에서 17석 밖에 얻지 못한 자민련에 3석의 의원을 꿔주며 교섭단체 구성을 지원하는 등 민주당의 노력으로 DJP가 일시적으로 복구되기도 했다. 하지만 대북햇볕정책의 이견을 좁히지 못하면서 2001년에 자민련이 임동원 통일부장관 해임안에 가담, DJP연합이 최종적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1999년말에 DJP복원의 상징으로 총리가 된 이한동 전 국회 부의장(14대 국회)은 "(1999년) 1월에 JP가 총리를 나오고 박태준 총재가 5월에 재판관계로 별안간 그만둬 5월 23일에 총리가 됐다"면서 "DJP가 완전히 결별했을 때 자민련 장관이 4~5명이 있었고 DJ가 국가적으로 IMF로 어려운 시기인데 정부를 이끌어 달라고 간곡히 얘기했다"며 "지금은 DJ와 JP가 험악하지만 앞으로 대통령 선거에서 DJP세력이 합당하는 데 역할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해 유임을 결정했다"고 했다. 그는 "굉장히 노력했지만 끝내 DJP합당은 안됐다"며 "모자람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대통령제에서 어려운 연정, 연합 = DJP연합에 대해 '정권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는 의견과 애초부터 지속가능하기 어려운 '정략적 조합'이었다는 평가가 존재한다.

원 전 의원은 "정권교체를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한다는 김대중 총재의 집념, 강한 의지가 (DJP연합을) 성사시켰다"면서 "(수평적 정권교체는)그 전까지 경험해본 일이 없었고 가능한 일인가 좌절까지 있었는데 실현되는 것을 보니까 감회가 남달랐다"고 했다. "수평적 정권교체이후 (진영별로) 10년 집권이 있었고 문재인정부로 바뀌었는데 민주주의가 실질적으로 살아 움직이면서 뿌리내리는 과정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인제 전 의원은 "대통령제에서 연정은 불가능하다"며 "협치라는 것, 협력하는 정치가 듣기는 좋아도 정치 형태로 성립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분권형 대통령제나 내각제로 하면 각 정당의 정체성을 훼손당하지 않고 연정할 수 있다"면서 "이제 다당제로 가는 분위기인 만큼 국가 경영을 원만하게 하려면 연정이 가능해야 하므로 정치구조를 바꿀 수밖에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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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규 기자 jkpark@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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