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현장 리포트
공화당 장악한 주, 여성의 자기결정권 박탈 시도
4월 7일 미국 텍사스에서 리젤 헤레라 (Lizelle Herrera)라는 26세 여성이 살인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녀가 저지른 '범죄'는 자가유도 방식의 낙태를 통해 태아를 살해했다는 것이다. 소식이 알려지자 곧 그녀의 체포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고, 당국에 석방을 요구하는 전화가 빗발쳤다. 그녀의 석방을 위한 보석금 50만달러 모금운동도 전개되었다. 두 아이의 엄마로 알려진 이 여성에게 관심이 쏠리면서 동시에 텍사스의 낙태금지법이 재조명을 받았다.
텍사스는 미국에서 낙태를 극단적으로 금지하는 대표적인 곳이다. 지난해 9월 1일부터 발효된 이른바 '심장박동법'이라 불리는 반낙태법은 태아의 심장박동이 감지된 이후 낙태를 전면 금지하고 있다. 초음파상 태아의 심장박동이 잡히는 것은 보통 임신 6주쯤이다. 이때는 대부분의 여성들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인지조차 못하는 시점이다. 따라서 원치 않는 임신의 경우에도 이미 낙태 시기를 놓치기 십상이다. 강간이나 근친상간에 의한 임신도 예외가 없다.
이 법이 시행되기 전 텍사스에서 시술된 낙태의 85% 이상이 6주 이상이라는 통계만 봐도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임신중지 선택권을 박탈당했는지 알 수 있다.
낙태권은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
지난 1973년 연방대법원의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로 미국에서 낙태권은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로 자리잡았다. 태아가 모체 밖에서 생존이 가능할 때(약 24주)까지 여성이 임신중단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엄연한 헌법상 권리다. 그럼에도 텍사스의 낙태금지법이 저지되지 않은 결정적인 이유는 연방법원의 제재를 받지 않도록 법 위반에 대한 단속을 정부기관이 아닌 민간인들 손에 맡겼기 때문이다. 이는 조지아 미시시피 켄터키 오하이오 등 텍사스와 비슷한 '심장박동법'을 제정한 주들이 연방법원의 위헌소송에 걸려 저지된 것과 대조된다.
따라서 지금 텍사스에서는 불법 낙태를 시술하거나 도움을 준 사람들에 대해 민간인들이 민사소송을 제기해 최소 1만달러 (약 1200만원)의 보상금을 받을 수 있다. 예를 들면 낙태시술을 한 의료진뿐 아니라 여성을 병원까지 태워다 준 택시기사도 민사소송을 당할 수 있다. 주정부가 직접 단속하거나 기소권을 행사하지 않고 대신 시민들 모두를 감시자로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리젤 헤레라는 그녀가 찾은 병원의 신고로 체포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텍사스 법은 임신한 여성은 처벌 대상이 아니라고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지금은 법 집행의 타깃을 불법낙태 시술자들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리젤 헤레라는 텍사스의 현행법하에서 아무런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 애초에 그녀가 체포될 법적 근거 자체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검사는 그녀가 체포된 지 나흘 만에 실수를 인정하면서 기소를 철회했다.
하지만 지금 미국에서 공화당 주도의 레드스테이트에서 벌어지는 낙태권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에 비춰볼 때 이 사건을 단순한 실수나 해프닝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보수적 대법원 판례 뒤집나
낙태에 대한 입장을 두고 미국은 지금 두 진영으로 갈라져 있다. 태아의 생명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입장(pro-life)과 여성의 자기결정권의 문제로 보는 입장 (pro-choice)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데, 곧 연방대법원이 역사적인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뒤집을 것이라는 전망이 커지면서 보수적인 공화당이 주도하는 주들을 중심으로 여성의 낙태권을 박탈하려는 움직임들이 점점 더 노골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최근 플로리다주에서는 15주 이후 낙태를 금지하는 법안에 주지사가 서명을 하면서 오는 7월 1일 실효를 앞두고 있다. 오클라호마주는 이달 초 낙태를 중범죄로 취급해 최고 10년의 징역형과 벌금 10만달러(약 1억2000만원)를 부과하는 낙태금지법을 통과시켰다. 여성의 생명이 위험한 경우를 제외하고 강간이나 근친상간으로 인한 임신에도 예외를 두지 않는다.
법원에서 제동이 걸리지 않는다면 오는 8월 말 발효될 예정인 사실상의 낙태 전면금지법으로 인해 오클라호마에 거주하는 여성들뿐 아니라 이웃 주인 텍사스의 여성들도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지난 9월 이후 텍사스주에서 낙태시술을 받을 수 없게 된 여성들이 가장 많이 원정을 가는 곳이 바로 오클라호마주이기 때문이다.
비영리 낙태클리닉인 플랜드 페런트후드(Planned Parenthood)의 경우를 보면 지난 9월부터 올 1월 사이 환자의 60%가 텍사스에서 온 여성들이었다. 2020년 같은 기간 동안 텍사스주에서 온 환자들이 10%였던 것에 비춰보면 그동안 오클라호마주가 텍사스 여성들에게 '피난처'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새 법이 시행되면 이제 오클라호마주 여성들도 피난처를 찾아 떠나야 한다. 텍사스의 여성들도 더 멀리 피난처를 찾아 떠나야 함은 물론이다.
임신 15주 이후의 낙태를 사실상 금지하는 미시시피주법의 위헌 여부를 결정하는 연방대법원의 판결이 오는 6월 경 나올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연방대법원 판사 9명 중 6명이 보수적 입장을 보이는 상황에서 보수진영은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뒤집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보고 있다.
따라서 대법원이 낙태권을 전면금지하거나 심각하게 제약하는 판결을 내릴 것이라는 것을 기정사실로 보고 주법을 만들고 있다. 실제 한 연구에 의하면 대법원이 판례를 뒤집을 경우 당장 미국 50개주 중 26개 주에서 낙태를 전면금지하거나 심각하게 제한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여성의 자기결정권·의료권 사수 움직임
반면 대법원의 판결을 예상해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의료권을 지키기 위한 움직임도 분주해지고 있다. 버몬트주의회는 지난 2월 낙태권을 주헌법상의 권리로 규정하는 주헌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주민투표에서 통과되면 미국 50개 주 최초로 낙태권이 주헌법상 권리로 명시될 것이다.
캘리포니아주는 낙태금지로 인해 타주로 가야 하는 여성들의 '피난처'가 되겠다고 약속하면서 캘리포니아를 찾는 여성들에게 낙태시술 비용과 기타 부가 비용과 서비스를 지원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최근에는 낙태시술에 대한 민간 건강보험 가입자들의 자비 부담을 없애는 법안이 통과되면서 더 많은 여성들이 비용 부담없이 양질의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기업들 또한 연달아 공화당 주도의 반낙태법에 대한 반대 입장을 밝히고 있다. 애플, 시티그룹 그리고 미국 최대 리뷰사이트 옐프는 낙태가 금지된 주에서 타주로 낙태시술을 받기 위해 가는 직원과 그 배우자에게 모든 비용을 지불하겠다고 발표했다. 차량공유 업체인 우버와 리프트는 텍사스에서 낙태를 위해 병원을 찾는 여성들을 태워다줬다는 이유로 고소를 당하는 기사들에게 소송비용을 전액 지원하겠다고 나섰다.
앞에서 언급했듯 현행 텍사스법에서 리젤 헤레라 같은 여성들을 체포할 법적 근거는 없다. 하지만 낙태를 이유로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 떨게 할 위축효과는 분명히 각인되었다. 낙태권이 전면 후퇴하는 상황이 오면 여성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미리 보여준다.
헤레라의 경우 의료진이 신고했다고 알려졌는데, 이는 의료진이 지켜야 할 비밀유지의무의 심각한 위반이다. 많은 여성들이 처벌의 두려움 때문에 의료진에게 사실을 말하지 않게 될 것이다. 낙태를 위해 타주로 갈 경제적 여유가 없는 여성은 낙태 합법화 이전처럼 안전하지 못한 '뒷골목 낙태'로 몰릴 것이 불보듯 뻔하다.
역사의 시계를 되돌린다면 최대 피해자는 가난한 유색인종 여성들이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낙태를 받는 여성들이 아니라 시술자들이 처벌 대상이라고 말하지만, 과연 계속 여성들에게 화살을 겨누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있나. 헤레라의 체포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경고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