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 아성 위협할 신재료 등장 '눈길'

2022-05-18 10:48:45 게재

뉴욕타임스 "전기화 경제 이끌 탄화규소 질화갈륨 등 채택하는 기업 늘어"

현대 전자기술은 실리콘(규소) 기반 마이크로칩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실리콘 반도체는 컴퓨터와 휴대폰뿐 아니라 점차 다른 모든 제품들로 영향력을 확산하고 있다. 반도체에 집적하는 트랜지스터 수가 2년마다 2배 증가한다는 무어의 법칙은 반도체 칩이 어떻게 소형화 효율화되는지 잘 보여준다.

하지만 실리콘의 아성을 위협할 신재료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현대기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도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파워 일렉트로닉스'(power electronics, 전력용 전자공학) 부문에서 특히 그렇다. 이 부문은 발전과 변전, 송전 등 대단위 전력을 다루는 전자공학이다.

현재 이 분야는 빠르게 변하고 있다. 공학자들이 실리콘 기반 칩이 아닌, 보다 빠르고 효율적으로 전기를 다룰 수 있는 새로운 재료에 기반한 전력제어장비로 전환하면서다. 실리콘을 쓰지 않는 새로운 장치는 이미 사용되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17일 "전세계 경제 구동축이 화석연료에서 전기로 전환되고 있다. 또 실리콘 칩 공급망은 심각히 뒤틀린 상태다. 이런 시대에 더 효율적인 파워 일렉트로닉스를 가능케 하는 신재료가 호황을 누리고 있다"고 전했다.

테슬라의 비밀병기

이 새로운 재료가 세간의 이목을 끈 것은 2017년이다. 전기차 제조사 테슬라가 두 종류의 성공적인 럭셔리 전기차를 출시하던 때다. 테슬라의 모델3은 베일에 가린 기술적 경쟁력을 가졌다. 실리콘이 아닌 실리콘 카바이드(탄화규소)칩을 전기차 핵심 부품인 '트랙션 인버터'(traction inverters)에 탑재하면서다. 트랙션 인버터는 배터리에서 전기를 끌어다 다른 형태로 전환한 뒤 모터에 전달해 바퀴를 굴리는 장치다.

테슬라가 자랑하는 가속도를 얻기 위해 트랙션 인버터는 수백kW의 전기를 뽑아내야 한다. 이는 작은 마을 전체에 공급할 만큼 대용량의 전력이다. 동시에 생사가 달린 고속주행에도 적합할 만큼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

테슬라 모델3에 쓰인 탄화규소는 규소와 탄소를 함유한 결합화합물이다. 테슬라에 탄화규소 반도체를 공급하는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는 "탄화규소 반도체로 테슬라 전기차의 주행거리가 10% 늘어났다. 또 차지하는 공간과 무게가 크게 줄었다"고 주장한다.

공간과 무게가 줄어들면 자동차 설계에 매우 유리해진다. 테슬라 전기차 부품들을 정밀 분해한 일본 나고야대 공학자 야마모토 마사요시는 "모델3의 공기저항 설계는 스포츠카와 비슷하다"며 "트랙션 인버터의 크기를 줄이면서 유선형 설계가 가능해졌다"고 말했다.

모델3은 전세계 히트작이었다. 획기적인 파워 일렉트로닉스 덕분이었다. 테슬라는 대형 전기차가 부드럽게 잘 작동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그 덕에 테슬라는 전세계에서 가장 가치가 큰 기업 중 하나가 됐다.

프랑스 반도체 시장동향 조사기업인 '욜르 데블로프망'의 애널리스트 클레어 트로덱은 "테슬라는 굉장한 혁신을 이뤘다. 그것도 1년 반 만에 이를 해냈다"고 말했다.

테슬라의 급성장을 본 다른 자동차제조사들도 공세적으로 전기차 전환 대열에 합류했다. 많은 기업들이 트랙션 인버터뿐 아니라 DC/DC컨버터 등 여러 전자부품에서 탄화규소를 사용할 계획이다. 자동차 에어컨장치, 집에서 자동차 배터리를 충전할 수 있는 내장 충전기 등이다. 탄화규소 가격은 실리콘보다 비싸지만 많은 제조사들은 '혜택이 비용을 압도한다'는 결론을 속속 내렸다.

더 많은 전기, 더 효율적으로 보내

미국 반도체 제조사 '울프스피드'는 지난달 10억달러를 들어 뉴욕주 북부지역에 탄화규소 반도체 팹을 열었다. 이 기업은 제너럴모터스(GM) 등 여러 자동차 제조사와 반도체 공급 계약을 맺었다. GM 부사장 실판 아민은 "고객들은 한번 충전에 더 멀리 주행할 수 있는 전기차를 찾는다"며 "우리가 설계하는 전기차의 파워 일렉트로닉스에서 탄화규소는 핵심 재료"라고 말했다.

뉴욕주 주지사 케이시 호컬은 울프스피드 공장 개소식 축사에서 "저 멀리 떨어진 곳에 실리콘밸리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그곳은 상당히 과장됐다"며 "나는 여러분을 '실리콘카바이드밸리'에 초청한 첫번째 사람이 되고 싶다. 왜냐하면 이 공장은 반도체의 미래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축사는 축사일 뿐, 실리콘은 예측가능한 미래에도 5000억달러 규모 반도체산업을 지속적으로 지배할 전망이다. 하지만 연간 약 200억달러 규모인 파워 일렉트로닉스 시장에서 탄화규소칩은 시장점유율을 크게 늘리고 있다.

욜르 데블로프망은 "탄화규소를 쓰는 자동차시장은 현재 10억달러 약간 넘는 수준이지만 2027년엔 50억달러 규모로 커질 전망"이라고 내다봤다.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부사장 에도아르도 메를리는 "탄화규소가 없었다면 전기차 호황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규소와 탄화규소는 전자장치에서 유용하다. 반도체이기 때문이다. 금속과 같은 전도체 기능을 하면서도 플라스틱처럼 부도체 기능도 한다. 이 덕분에 반도체는 트랜지스터의 핵심 재료가 된다.

탄화규소가 규소와 다른 점은 넓은 범위의 밴드갭(bandgap), 즉 에너지 간격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는 탄화수소를 전도체와 부도체로 상호 전환하려면 더 많은 에너지를 주입해야 한다는 의미다. '와이드 밴드갭'(Wide bandgap, WBG)의 반도체는 파워 일렉트로닉스에서 특히 유리하다. 더 많은 전기를 보다 효율적으로 이동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탄화규소는 WBG의 어르신 격이다. 지난 수십년 동안 트랜지스터 재료로 개발되고 있다. 그 와중에 과학자들은 더 젊은 WBG 물질들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질화갈륨(GaN)이 대표적이다. 연구자들은 1980년대 질화갈륨을 활용해 세계 최초로 밝은하늘색을 내는 LED를 만들었다. 이는 고에너지 광자로 구성된다. 질화갈륨은 넓은 밴드갭을 갖고 있기에 충분한 에너지로 광자를 생산하는 첫번째 반도체였다. 이같이 효율이 높은 청색 LED 개발하고 상용화한 3명의 과학자들은 2014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현재 TV스크린과 전구와 같은 기기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된다.

최근 연구자들은 파워 일렉트로닉스를 개선하기 위해 질화갈륨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질화갈륨은 또 휴대폰과 컴퓨터를 충전하는 어댑터에서도 상업적 결실을 맺었다. 실리콘 트랜지스터를 사용하는 전통의 어댑터보다 더 작고 더 가볍고 더 빨리 충전시킬 수 있다. 그리고 더 효율적이다.

지난해 가을부터 애플의 질화갈륨 노트북 충전기에 트랜지스터를 공급하는 캐나다 기업 'GaN시스템즈'의 CEO 짐 위덤은 "컴퓨터에 쓰는 일반 충전기는 약 90% 효율을 갖는다"며 "질화갈륨 충전기의 효율은 98%다. 전력손실을 1/4로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욜르 데블로프망에 따르면 올해 질화갈륨 시장은 약 2억달러에 불과하지만 2027년엔 20억달러로 성장할 전망이다.

데이터센터, 신재생에너지에도 적용

WBG 재료들은 다른 분야에도 적용된다. 컴퓨터 서버들로 가득한 대형 시설물인 데이터센터다. 데이터센터는 전기를 많이 잡아먹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데이터센터에 고급 전력공급기를 공급하는 기업 '컴퓨웨어'는 "질화갈륨 기반 전원공급기는 전통의 기기보다 전력 낭비를 약 25% 줄이고 공간을 20% 덜 차지한다"며 "전세계 주요 기업들이 운영하는 데이터센터에 질화갈륨 전원공급장치가 쓰이고 있다"고 말했다.

신재생 에너지 분야도 WBG 재료를 고려하고 있다. 태앙광 전지와 풍력 터빈은 인버터를 갖고 있다. 생산한 전기를 가정이나 전력그리드에 공급하기 위해서다. 많은 기업들이 기존의 규소보다 질화갈륨이 더 우수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태양광 인버터 공급기업인 '인페이즈'는 현재 질화갈륨 기반 인버터를 시험중이다. 태양광 패널은 수십년 동안 여름과 겨울 등 극과 극을 오가는 계절 조건을 버틸 수 있어야 한다.

인페이즈는 최근 자사 인버터를 물이 담긴 압력솥에 담근 뒤 이를 봉인해 21일 동안 영상 85℃, 영하 40℃의 환경에 노출시키는 실험을 진행중이다. 만약 질화갈륨 인버터가 이 실험에서 온전히 기능을 유지한다면, 인페이즈는 질화갈륨 인버터로 사업을 전면 전환할 계획이다. 이 회사 공동창업자 라구 벨루르는 "그런 방향으로 확실히 가고 있다"고 말했다. 인페이즈의 한 선임 공학자는 지난해 투자자 미팅에서 "실리콘의 미래는 종말을 맞을 것"이라는 매우 극단적인 예측을 내놓기도 했다.

실리콘 공급망이 차질을 빚으면서 전세계적으로 반도체칩 부족 상황이 연출됐지만 WBG 부품을 생산하는 기업들은 대부분 이 위기를 모면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글로벌 무역을 뒤흔들기 전, 탄화규소와 질화갈륨은 빠르게 점유율을 늘리고 있었다. 이 새로운 재료에 관심을 가진 기업들은 관련 생산기업들과 장기 공급계약을 맺고 있다. 현재의 실리콘칩 위기가 WBG칩에서도 재연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기업들이 탄화규소와 질화갈륨으로 업그레이드 하는 와중에서 연구자들은 파워 일렉트로닉스를 더욱 개선할 수 있는 새로운 WBG 재료를 개발중이다. 일본국립정보통신기술연구소 연구자인 히가시와키 마사타카는 2012년부터 산화갈륨에 기반한 트랜지스터를 실험하고 있다. 산화갈륨은 탄화규소나 질화갈륨보다 밴드갭이 훨씬 넓은 물질이다.

히가시와키 박사는 "산화갈륨으로 만든 부품들은 규소나 탄화규소, 질화갈륨보다 전력손실이 훨씬 더 낮다. 따라서 효율성이 매우 높다"고 말했다. 그는 "개발 과정에 빠른 진전을 보이고 있다. 향후 10년 내 전기차 트랙션 인버터와 산화갈륨칩이 들어갈 것"이라고 자신했다.

욜르 데블로프망의 트로덱 애널리스트는 "초광범위한 밴드갭을 갖는 물질은 다이아몬드"라며 "꽤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값비싼 보석을 값비싼 반도체로 전환할 날도 올 수 있다"고 말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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