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에너지위기에 산업공동화 우려

2022-10-21 11:39:14 게재

FT "생존 기로에 선 유럽 기업들 생산량 감축, 공장시설 이전 등 타개책 모색"

프랑스 건설자재 제조사인 생고뱅은 샹베로 소재 물류창고 직원들에게 두툼한 방한복과 장갑을 지급했다. 에너지비용이 치솟으면서 올 겨울 창고 난방을 중단키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창고 내 온도는 예년같으면 15℃를 유지하겠지만 올 겨울엔 8℃로 내려갈 전망이다. 생고뱅 부사장 브노와 디리바네는 "한데에서 일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그에 따라 필요한 장비를 지급하고 있다"고 말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20일 "유럽의 많은 기업들은 올 겨울 닥칠 혹독한 추위를 두려워하고 있다. 실내온도를 낮추는 건 단순히 비용절감 차원이 아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에너지가격이 전례없는 수준으로 치솟으면서, 이는 생존의 문제로 바뀌었다"고 전했다.


유럽 산업계엔 약 3500만명의 노동자가 종사한다. 전체 노동인구의 대략 15% 수준이다. 유럽산업원탁회의는 최근 유럽연합(EU) 위원회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위원장에게 보낸 서한에서 "에너지가격이 치솟으면서 유럽 산업계의 경쟁력이 급속히 추락하고 있다"며 "에너지 집중소비 기업들에 대한 가격제한 조치가 없다면 피해는 회복불가능한 수준으로 커질 것"이라고 호소했다.

주요 기업들은 겨울이 닥치기 전부터 일부 분야의 생산량을 줄이고 있다. 화학·비료·세라믹기업들은 시장점유율을 영구적으로 잃을 수 있다며 에너지 공급이 탄탄하면서도 가격이 저렴한 다른 나라로 생산기지를 옮길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벨기에 총리 알렉산더르 더크로는 "유럽대륙이 산업공동화 위기에 직면했다"고 말했다.

기업들, 위기서 살아남으려 몸부림

프랑스 자동차제조사 르노는 차체 도색 페인트의 적정온도를 유지하는 시간을 크게 줄였다. 전체 가스소비의 40%가 이 용도에 투입되기 때문이다. 기초화학제품과 제약 원료를 만드는 독일 화학기업 랑세스는 에너지 비용이 급증하면서 기준가격을 35% 인상했다.

영국 제지 및 패키징 기업 DS스미스는 공장에서 쓰는 에너지를 15% 줄이기로 했다. 생산공정들 사이에는 기계와 장비들을 꺼놓을 계획이다. 프랑스 자동차 부품사 발레오는 자사 공장들에 에너지 소비를 20% 줄이라고 지시했다. 주말엔 생산을 중단하고 주중엔 난방온도를 낮추는 등의 조치가 취해진다. 벨기에 화학기업 솔베이는 공장의 가스 소비를 30% 줄이기 위해 대체에너지나 이동가능한 디젤연료 보일러를 쓰기로 했다.

가스는 유럽 산업기업들에게 가장 중요한 단일 에너지원이다. 동시에 화학품과 비료업계엔 중요한 공급원료이기도 하다. 옥스퍼드에너지연구소 가스연구 프로그램 부국장인 아눅 오노레에 따르면 산업계는 유럽 가스 총공급량의 27~28%를 소비한다.

생산과정에서 연료를 줄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산업용 가스의 약 60%는 유리와 시멘트 세라믹 등 500℃ 이상의 고압 제조 프로세스에 사용된다. 오노레 부국장은 "그보다 낮은 온도의 제조 프로세스에선 신재생에너지나 열펌프 등 다른 선택지가 있다"고 했다.

일부 기업은 화석연료로 눈을 돌리고 있다. 2019년 신재생에너지로 완전 전환하겠다고 선언한 독일 바이엘은 현재 석탄 카드를 다시 꺼내들었다. 생산에 필요한 열량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서다.

자동차제조사 폭스바겐은 볼프스부르크에 자체 발전소를 운영하고 있다. 탈탄소 노력의 일환으로 가스발전 전환을 계획했지만 올 겨울과 내년 겨울엔 석탄을 땔 작정이다.

설상가상으로 대안에너지 공급도 원활치 않다. 올 여름 극심한 가뭄으로 유럽의 수력발전 능력이 줄었다. 또 프랑스의 핵발전소는 노후화에 따른 정비 때문에 전력 수요를 맞추기 어렵다.

철강 비료 등 생산량 줄어

치솟는 에너지가격과 소비자 수요 둔화 등 이중고에 직면한 일부 기업들은 생산량 감축을 최선의 대응책으로 보고 있다.

투자은행 제퍼리스 추산에 따르면 최근 여러달 동안 유럽 조강(crude steel) 능력의 약 10%가 놀고 있다. 유럽 최대 철강기업인 아르셀로미탈은 생산량 감축으로 올해 4분기 생산량이 전년 동기 대비 17% 낮아질 것으로 예상했다.

유럽금속협회(Eurometaux)는 EU의 아연 제련소들이 생산량을 줄이거나 아예 완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1차알루미늄 생산량의 50%, 실리콘과 합금철 생산량의 약 27%가 중단됐다. 제련소 약 40%가 현재 휴무 상태다.

암모니아 생산 공급원료로 가스를 쓰는 비료업계 역시 타격을 받았다. 유럽비료협회에 따르면 비료생산능력 70%가 멈춰섰다. 골드만삭스는 에너지가격 상승이 제한되지 않는다면 유럽 화학산업 40%가 영구적인 구조조정에 직면할 것이라고 추산했다. 독일 특수화학기업 코베스트로는 성명서에서 "에너지가격 급등 때문에 지속적으로 생산량 수준을 재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컨설팅기업 로디엄에 따르면, 유럽 산업용가스 수요의 81%를 △화학 △강철 등 기초금속 △시멘트와 유리 등 비금속 광물제품 △제련과 코킹 △제지와 인쇄 등 단 5개 업종이 쓰고 있다. 이런 업종의 경우 한시적인 공장폐쇄의 대가가 엄청날 수 있다. 에너지를 아끼려고 장비나 시설을 꺼놓을 경우 영구적으로 망가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생고뱅의 디리바네 부사장은 "유리가 굳는 것을 막기 위해 용광로를 계속 가동해야 한다"며 "가스 소비를 30% 줄인다는 건 사실상 시설을 멈춰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공장설비가 망가진다. 다시 공장을 돌리는 데 6개월에서 1년이 걸린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가동을 중단하는 기업이 있다. 프랑스 유리제품 제조사 아크 인터내셔널의 공장 용광로는 하루 24시간 가동돼야 한다. 공장에서 쓰는 에너지 절반이 여기에 투입된다. 가스 비용이 올해 약 4배 치솟으면서 이 기업은 9개 중 2개의 용광로를 놀리고 있다. 또 다른 2개 용광로는 정비기간을 늘렸다. 이 기업 CEO 니콜라스 호들러는 "직원 1/3이 매주 이틀씩 휴가를 쓰고 있다"고 했다.

에너지 고비용에 따른 경쟁력 상실

공장폐쇄가 늘어나면서 에너지 비용이 덜 들어가는 타국의 경쟁기업들에게 밀린다는 우려감이 커지고 있다. 이탈리아 세라믹협회 회장 지오바니 사보라니는 "수출 감소 또는 중단은 일시적이라 해도 시장점유율이 영구적 손실로 전환될 위험이 있다"고 우려했다.

유럽 제조사들은 오래 전부터 에너지 고비용에 따른 경쟁력 상실을 우려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2020년까지 10여년 이상 유럽의 가스가격은 미국보다 평균 2~3배 높았다. 그같은 격차는 러시아가 공급량을 줄이면서 현재 10배 이상 커졌다. 유럽비료협회 회장 자코브 한센은 "우리가 생산하는 비료보다 절반 이상 저렴한 타국의 비료를 수입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유럽화학산업협회(Cefic)에 따르면 올해 3월 이후 유럽은 사상 처음으로 물량이나 금액 모두에서 화학제품 순수입국이 됐다. 이 협회 사무총장 마르코 멘싱크는 "이는 심각한 우려를 자아낸다"며 "에너지 비용 때문에 유럽 화학제품들은 글로벌 기준에서 터무니없이 비싸다"고 말했다.

시장점유율을 지키기 위해 상당수 기업들이 유럽 밖으로 공장을 옮기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벨기에 솔베이의 CEO 일함 카드리는 "필요하다면 에너지 비용이 낮은 곳에서 에너지집중 제품을 더 생산하는 방법을 모색하겠다"며 "우리는 글로벌 기업이다. 유럽에서 줄어든 생산량을 다른 곳에서 보상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탈리아의 한 철강기업 CEO는 "에너지 비용이 높은 데다 탄소세도 내야 한다. 철강을 어디서 생산할지 고심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만드는 철강의 가격은 톤당 800유로다. 예전 가스가격은 톤당 40유로였지만 이젠 400유로로 급등했다. 탄소세까지 더하면 에너지 비용으로만 톤당 600달러가 든다"며 "아시아로 생산기지를 옮기는 게 더 합리적"이라고 덧붙였다.

아일랜드 포장재기업 스머핏카파, DS스미스 모두 북미에 공장을 두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DS스미스의 CEO 마일스 로버츠는 "종이를 만들려면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미국에서는 에너지 공급이 원활하고 비용은 훨씬 저렴하다"고 주장했다.

전문가들은 유럽 기업들이 생산시설을 다른 곳으로 옮길 수밖에 없다면 유럽의 생산능력이 회복되지 않을 위험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옥스퍼드에너지연구소 오노레 부국장은 "유럽 가스가격이 2010~2014년 상대적으로 높아졌다. 상당수 기업들이 중동이나 북아프리카 미국 등 다른 대륙들로 시설을 옮겼다. 그러자 산업용 가스 수요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바이엘 이사인 마티아스 베르닝거는 "일단 시설 이전 투자결정이 이뤄지면 기업들에게 다시 돌아오라고 요구하기가 어렵다"며 "새로운 부지에 대한 투자는 향후 수십년을 내다보고 하는 결정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로디엄의 트레버 하우저는 "비료산업처럼 낮은 마진에 가스를 집중사용하는 원자재 생산기업들이 첫번째 희생양이 될 수 있다"며 "유럽에서 천연가스에 기반해 비료를 생산하는 것은 향후 오랫동안 경제적으로 불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중부, 동부유럽이 특히 심각하다. 많은 국가들이 러시아 가스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유럽의 한해 비료 생산량은 4500만톤인데, 이 중 폴란드가 600만톤을 생산한다. 현재 폴란드 5개 비료공장 모두 놀고 있다. 헝가리와 루마니아 크로아티에 있는 또 다른 300만톤 용량의 생산시설도 휴무 상황이다. 유럽 생산능력의 20%가 폐쇄됐다.

헝가리 비료제조사 니트로겐뮤베크는 생산량을 크게 줄여야 했다. 최고전략담당관인 졸탄 비제는 "생산용량 감축에 따라 올 겨울 치명적인 영향을 받을 것"이라며 "여름에 생산을 제대로 못했기 때문에 재고가 축적되지 않았다. 유럽 전반에 내년 봄에 쓸 비료가 없다"고 말했다.

가치사슬 전반에 우려 커져

화학제품과 철강, 기타 주요 기초제품의 생산량 감소는 가치사슬 전반에서 우려를 고조시키고 있다.

볼보와 바이엘 등의 기업들은 공급이 막힐 것에 대비해 부품과 원료 등을 쌓아두기 시작했다. 바이엘의 베르닝거 이사는 "주요 걱정거리는 에너지 가격이 아니라 약품으로 전환하는 기초투입물의 이용가능성"이라고 말했다.

글로벌 화학기업인 독일 바스프(BASF)의 루트비히스하펜 공장은 연관업종 경영진에게 큰 걱정을 안기고 있다. 전세계 최대 통합화학공장인 이곳은 자동차에서 치약에 이르기까지 모든 제품에 필요한 화학품의 핵심 공급원이자 독일 산업계의 심장이다.

유럽화학산업협회 멘싱크는 "만약 독일 화학산업계에 문제가 생긴다면, 3주 뒤 유럽 내 모든 공급망에 문제가 생긴다"고 말했다. 바스프와 같은 거대 기업의 생산량이 가스 배급제로 차질을 빚는다면 다른 나라 기업들도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는 의미다. 생고뱅의 디리바네 부사장은 "만약 독일이 제때 공급할 수 없다면, 유럽 전 지역에 거대한 파급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독일 기업들은 금액 기준으로 유럽에서 팔리는 총 산업생산량의 27%를 담당한다. 올해 초만 해도 독일은 가스 수입량의 50% 이상을 러시아에서 들여왔다. 독일 기업들은 전체 가스수요의 1/3 이상을 차지한다.

독일정부는 최근 2000억유로 부양 패키지를 공개했다. 가계와 기업이 부담하는 높은 에너지비용을 상쇄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철강기업 티센크루프 등 독일 제조사들은 에너지 위기가 지속된다면 전면적인 조치가 필요할 것으로 보고 있다.

티센크루프는 "에너지 비용이 계속 오른다면 개별 공장들을 폐쇄할 준비도 하고 있다"며 "철강업과 같은 에너지 집중사용 기업들에게 가스와 전기 비용은 존재론적 위협을 가한다"고 말했다.

독일만큼 산업 영향력이 크지 않지만 경제와 고용에 대한 제조업 비중이 큰 나라들도 걱정이 태산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폴란드와 체코공화국 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 스웨덴 핀란드 이탈리아 북부 등이 가스 집중사용 제조업의 고용 비중이 매우 큰 나라다.

날씨가 점차 추워져 에너지 수요가 상승하면서 이들 국가는 기업과 시민들에게 각종 보조금을 지원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하지만 많은 기업들은 올 겨울뿐 아니라 내년 겨울도 걱정하고 있다. 상황이 더욱 악화할 것으로 예상한다.

헝가리 니트로겐뮤베크의 비제 담당관은 "올해는 그래도 러시아 가스를 수입할 수 있었다. 내년 러시아 가스 수입이 끊긴다면 2023~2024년 겨울은 암울할 수밖에 없다. 다른 나라에서 가스를 수입하겠지만, 기존 인프라를 따라잡을 수 있는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아크 인터내셔널의 호들러 CEO는 "내년에도 계속 에너지 비용이 오른다면 정말 심각한 타격을 받는다. 모든 추가비용을 고객들에게 전가할 수 없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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