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룰라 취임, 재정난·의회설득 난제

2023-01-02 11:13:27 게재

영국 이코노미스트 "1·2차 임기와 다른 경제환경 … 노련한 협상가 명성 입증해야 국정 원활"

새해 1일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가 브라질 대통령에 취임했다. 2003년 첫번째 대통령 임기를 시작한 지 정확히 20년 만이다. 이후 브라질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룰라도 마찬가지였다. 노조지도자이자 좌파 노동자당 창당인 출신인 그는 2010년 두번의 대통령 임기를 83% 지지율로 마쳤다. 2018년엔 부패혐의로 18개월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이후 대법원 판결로 해당 혐의는 취소됐다. 2022년 10월 대선에서 현직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을 접전 끝에 물리치며 3번째 대통령직을 거머쥐었다.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대선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뚜렷한 증거 없이 대선결과가 조작됐다고 주장했고, 집권당 역시 선거결과를 뒤집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허사였다. 지난달 브라질 국민 대다수가 월드컵에 관심을 집중하던 때, 보우소나루 지지자 수백명은 수도 브라질리아 군사령부 앞에서 쿠데타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취임식 후 지지자들에게 인사하는 룰라. 연합뉴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1일 온라인판 기사에서 "룰라 대통령 앞엔 전 정권의 경제실정에서 비롯한 과제가 산적하다"고 짚었다. 대선 전 집권당의 막대한 부양책 덕분에 2022년 브라질 경제성장률은 2.9%로 추정된다. 하지만 올해는 1%로 하락할 전망이다. 인플레이션은 지난해 4월 12%로 정점에 달했다가 11월 6%대까지 하락했다. 하지만 끼니를 거르는 인구 비중은 크게 늘었다. 보우소나루가 취임하던 2019년 6%에서 지난해 말 16%까지 상승했다. 전 정부는 자유주의 경제개혁을 약속했지만 공적연금 기반을 확충한 것 외엔 대부분 실패했다. 전 정부 집권기 브라질 공공부채율은 크게 상승했다.

그에 따른 재정난은 룰라 대통령 경제정책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 룰라정부는 전 정권에서 시작한 다양한 사회부양 프로그램을 개혁해 빈곤율을 낮출 계획이다. 여기엔 저소득층 지원 프로그램 '보우사 파밀리아'(패밀리 펀드), 주택 지원 프로그램 '미냐 카사, 미냐 비다'(마이 하우스, 마이 라이프), 일자리 증진과 인프라 확충을 위한 공공근로 프로젝트 등이 있다.

룰라 대통령은 또 아마존 불법 삼림파괴도 적극 저지할 계획이다. 전 정부 아래서 삼림파괴 속도가 60% 늘었다. 정부와 지자체가 불법 벌목과 채굴, 토지횡령 등에 눈감으면서다. 신임 환경장관에 마리나 시우바가 임명됐다. 그는 2003~2008년 해당부처를 이끈 바 있다. 2000년대 삼림파괴를 막는 데 일조했던 범부처 합동단속을 다시 시작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현재 인플레이션을 고려한 환경부 예산은 2010년 룰라 2기정부 때와 비교해 1/4로 줄었다. 룰라정부는 서방국가들에 아마존 환경보호와 지속가능 개발을 위한 지원금을 요청할 계획이다.

룰라 당선자가 정권 인수기간 매달린 과제는 2023년 예산이었다.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이 대선 승리를 위해 대대적으로 지원금을 뿌리면서 (국내총생산)GDP의 1.7%에 달하는 세수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룰라는 지난 두달여의 정권 인수기간 동안 의회를 상대로 연방지출 한도를 늘리는 내용의 헌법 개정안을 지지해달라고 읍소했다. 연방지출 한도 조항은 2014~2016년 재정위기와 경기침체기, 헌법에 삽입됐다. 정부예산 증가율이 전년도 인플레이션을 상회할 수 없도록 한 조항이다.

룰라의 헌법 개정안은 휴회 전날인 지난달 21일(현지시각) 의회를 통과했다. 부족한 예산을 채우지 못했다면, 룰라정부는 보건과 교육, 2200만 빈곤가정을 지원하는 바우사 파밀리아 등의 예산을 삭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예산을 늘리기 위해 헌법을 바꿔야 한다는 건 브라질 정치의 난맥상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1988년 신헌법 초안 이후 140번 이상 개정됐다. 예산지출 효율화를 위한 개혁보다 일단 더 많은 국채를 발행하는 데 주력하면서다.

의회 예산위 소속 상원의원 마르셀루 카스트루는 "룰라 당선자가 취임 전 이 모든 것을 다뤄야 했다는 것은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룰라는 20개가 넘는 정당의 대표들과 옥신각신하면서 자신을 지지하도록 협상력을 발휘했다. 이코노미스트는 "룰라가 자신의 야심찬 계획을 달성하기 위한 첫번째 단계, 즉 의회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점을 잘 이해하고 있음을 시사한다"고 전했다.

노련한 협상가라는 룰라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이는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노동자당의 의석 점유율은 12%에 그친다. 브라질 의회에서 다수를 점하는 정당연합이 가능하려면 '기브 앤드 테이크'(주고받기) 관행을 따라야 한다. 기회주의적인 중도우파 정당들에게 권력의 일부분을 내주는 거래를 해야 하는 과정이다. 노동자당 소속 한 상원의원은 이 과정에서 "각 정당이 정부를 지지하는 대가로 요구한 각료 숫자가 매우 부풀려졌다"며 비난하기도 했다. 룰라정부는 어업부 등 14개의 부처를 신설해 총 부처숫자를 37개로 늘릴 계획이다.

의회의 힘은 룰라가 2010년 퇴임한 이후 더욱 강력해졌다.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도 취임 초기엔 '주고받기'를 회피했지만, 결국은 그같은 관행을 받아들여 극단까지 밀어붙였다. 수백억헤알(1헤알=약 240원)에 달하는 연방정부 예산 결정권을 하원의장인 아르뚜르 리라에게 넘겼다. 그 대가로 자신에 대한 탄핵을 막았다. 리라 의장은 그 돈을 자신과 정치적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지자체 등에 내려보냈다. 도로 건설이나 트랙터 구매와 같이 표를 얻는 데 유리한 방향으로 집행하기 위해서다. 룰라는 대선 기간 이를 '비밀예산'이라며 공격했다. 브라질 대법원도 이를 두고 '헌법에 어긋난다'고 판결했다. 각 부처 예산을 조금씩 빼내 뇌물이 오가는 환경을 만드는 데 일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선 이후 룰라는 리라 의장과 대화를 시작하면서 태도를 누그러뜨렸다. 이는 많은 이를 놀래켰다. 리라 의장은 보우소나루와 한배를 탔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리라 의장 역시 룰라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실용주의자였다. 그는 룰라의 당선을 인정한 첫번째 주요 정치인이었다. 보우소나루 진영으로 여겨진 많은 정치인들도 리라 의장 뒤를 이어 대선에 승복했다.

한때 보우소나루를 지지한 많은 정치인들이 이제는 룰라를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룰라에게 의회 다수당을 안길 정당 중 하나인 '우니앙 브라질'(통합 브라질) 대표 루시아누 비바르는 "상황이 좋을 때 정부에 반대하는 것은 국가전체에 반대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보우소나루의 자유당 소속 의원 일부도 룰라정부 편으로 이동했다. 자유당 의원인 쏘스데네스 까바우깐치는 "정당은 소속 의원들에 어느 정도 영향력을 갖고 있지만 정부의 힘은 그보다 훨씬 강력하다"고 말했다.

예산기획부 장관으로 내정된 상원의원 시모니 테베치는 "하지만 의회가 모든 사안에 호의를 베풀지는 않을 것"이라며 "의원들은 경제성장을 위한 룰라정부의 정책엔 적극 찬성하겠지만, 좌파적 사회의제에 대해선 반기를 들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했다.

룰라 대통령이 추진하는 범정당 연합은 불안정해질 가능성이 크다. 브라질 의회 내 대통령 영향력은 지지도와 연동된다. 지지도는 결국 경제상황과 맞물려 있다. 의회 농수산 이익단체 부대표인 네리 겔러는 "룰라 대통령이 도로와 항만 건설, 브라질개발은행(BNDES) 보조금과 같은 인프라 프로젝트로 보우소나루의 지지가 컸던 농촌에서 인기를 회복할 수 있다"면서도 "하지만 현재의 브라질 재정상황과 글로벌 경기침체 전망은 원자재 호황기와 맞물렸던 룰라의 2차례 임기 때와는 크게 다르다. 때문에 지지율 상승이 만만찮은 과제가 될 전망"이라고 말했다.

룰라정부 재무장관으로 임명된 페르낭두 아다지는 정부의 예산 한도를 늘리기 위해 새로운 재정준칙을 수립하는 동시에 시장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재정건전성에 대한 새로운 규정도 함께 마련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 경제성장률을 높이기 위해 세법도 개정할 방침이다. 난마처럼 얽힌 복잡한 세법을 단순화하는 작업이다. 하지만 아다지 장관은 "향후 룰라정부는 상속받은 재산 등에 과세하면서 보다 누진적인 세제를 만들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 10년 브라질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0.5%에 그쳤다. 경제성장률을 높여야 룰라정부가 계획하는 사회적 프로그램에 재정을 투입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노동자당의 좌파 개입주의 정책이 경제를 옥죌 것이라고 우려한다. 컨설팅기업 '아고라'는 "금융시장은 보우소나루정부보다 룰라정부에 훨씬 인색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아다지가 재무장관에 임명된 직후 헤알화 가치는 하락했다.

룰라 대통령은 행정명령 등으로 경제 어젠다 일부를 빠르게 밀어붙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주택과 고용 프로그램을 시작한다거나 브라질개발은행을 통해 서민과 중소기업 대출을 늘리는 방식이다. 노동자당은 이를 통해 소비를 증진하고 경제성장률을 높이려 한다. 하지만 주요 개혁안건의 경우 의회를 통과해야 한다.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브라질에서도 경제상황이 좋아야 정부정책에 대한 의회의 지지가 늘어난다. 경제가 안좋을 때엔 그 반대상황이 벌어진다. 고통스런 개혁과제는 거의 수행할 수 없게 된다. 노동자당 상원의원인 움베르투 코스타는 "우리는 룰라의 정치력에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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