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진단

복합거시이행 시기를 넘는 법, 민간에 답 있다

2023-01-06 11:47:27 게재
전재성 서울대 교수 정치외교학부

2023년 새해를 맞이하는 마음이 가볍지만은 않다. 유례없이 치솟는 물가, 종잡을 수 없는 기후변화, 진정되지 않는 코로나 위기, 한국을 주적으로 삼아 핵무기를 사용하겠다는 북한, 한반도 바로 옆 대만해협을 둘러싼 전쟁위기,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세계경제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 우크라이나전쟁 등 좋은 소식보다는 힘든 뉴스들이 새해 벽두를 장식하고 있다. 많은 이들은 지금의 상황을 복합위기, 초불확실성의 시대 등으로 표현한다. 너무나 많고 다양한 변화들이 한꺼번에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정확한 진단이 어려운 상황이다.

세계질서 변화는 역사적으로 다양한 모습을 띤다. 때로는 하나의 위기가 크게 발생하기도 하고 다양한 위기가 복합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작고 미시적인 변화의 시기가 있는가 하면 거시적이고 근본적인 이행의 시기도 있다. 지금은 거시적인 변화들이 복합적으로 일어나는 복합거시이행 시기다. 크고 중대한 여러 변화들이 상호작용하면서 한꺼번에 일어나기 때문에 감당할 수 없는 위기, 이해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현상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각각의 변화들을 하나씩 차분하게 따져보고 이들이 서로 어떻게 얽혀가고 있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단일 국가가 주도하던 질서는 없어

미국과 소련이 세계를 양대 진영으로 나누고 핵전쟁의 위험 앞에 대립하던 냉전이 끝난 이후 세계는 미국의 리더십 하에 평화와 안정을 구가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30년이 지난 지금, 그런 판단은 오류로 판명됐다. 냉전에 비해 안정적이라고 보였던 대비효과가 섣부른 낙관론을 불러온 것이다. 탈냉전 30년 동안 미국 주도 질서에 반발하는 3세계 국가들, 테러집단들이 생겨났고, 신자유주의 논리에 기초한 지구화는 경제위기를 배태하고 있었고, 인간들의 이익을 중심으로 자연을 착취하던 행태는 환경파괴와 보건위기를 불러오고 있었다. 전혀 새로운 위기들이 서서히 형성되던 시기에 인류는 냉전의 종식과 미국 주도 질서라는 단편적 현상에 기대어 안정적인 세계질서가 형성되고 있다고 착각했던 것이다.

앞으로의 국제정치는 몇가지 특징을 가지게 될 것이다. 첫째, 미국과 같이 여전히 강대한 세계 1위의 국가라고 해도 세계질서를 단독으로 이끌기는 어려울 것이다. 지금까지의 세계질서를 묘사할 때 '미국 주도의 질서'라는 표현을 많이 썼지만 앞으로는 한 국가가 주도하는 질서를 만들기에 세계의 문제가 너무 복잡해져 있다. 미국 스스로도 동맹과 전략 파트너십이 미국의 리더십에 핵심적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둘째, 미중경쟁을 묘사할 때 양극체제라는 인식이 있지만 이제 '극'(極)을 이룰 수 있는 국가들이 입지가 약화될 것이다. 국제정치에서 극 국가라는 표현은 압도적인 국력을 가진 국가들을 지칭하지만 이제 소수의 강대국들이 두드러지기는 어렵게 됐다. 미국과 중국 이외에 유럽연합 일본 아세안 국가들은 물론 여러 중견국들의 영향력이 강화됐다. 최근 우크라이나전쟁에서 중재자 역할을 한 튀르키예, 미국 외교정책에 반발하는 사우디아라비아, 러시아를 지원해 우크라이나전쟁의 판도에 영향을 미치는 이란은 물론, 반도체를 비롯한 세계 기술 지형에 목소리를 내는 대만 한국 등 강대국들만의 국제정치는 약화되고 있다.

셋째, 국가 중심의 국제질서 역시 변화중이다. 다층적인 지구화의 흐름 속에 국가들 만이 세계질서를 이끄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이미 유럽연합 아세안처럼 국가들 간 연합체, 다양한 국제기구들의 영향력이 증대됐고, 기업 시민사회 과학자집단 등 비국가 행위자의 역할이 크게 강화됐다. 하나의 사안에 다양한 이해당사자가 생겼기 때문에 이들 간의 타협과 조정이 중요해진 것이다.

넷째, 인간 중심의 세계질서가 변화되고 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으로 지구를 지배한 것 같았지만 지구와 생태계의 반격을 감당하기 어려워졌다. 소위 인류세는 위기를 맞이했고 기후변화를 비롯한 생태계의 위기를 지혜롭게 해결하지 못하면 인류의 생존 자체가 위협을 받는 처지에 놓여있다.

다섯째, 4차산업혁명이라는 기술의 급속한 변화, 그리고 고령화와 같은 인구변화가 중요한 변수가 됐다. 과거에는 기술과 인구의 변화가 서서히 일어났기 때문에 다른 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배경변수, 혹은 기저변수의 역할을 했지만 이제는 혁명적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기술과 인구의 변화를 국제사회와 개별 국가들이 어떻게 관리하는가에 따라 세계질서가 변화될 것이다.

각국, 중장기 전략 일신해 질서 변화 대응

이러한 변화들은 경험해보지 못한 거시적이고 근본적인 변화들이다. 각각의 변화들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것은 물론 이들 간의 상호작용은 더욱 예측하기 어렵다.

많은 국가들은 중장기 전략을 일신해 새로운 국제질서의 변화에 대응하고 있다. 일례로 바이든정부는 극단적 정치 양극화 속에서도 많은 법들을 생산하고 있다. 명칭도 복잡한 반도체법 경쟁법 인플레이션법 등 다양한 입법성과를 내고 있으며, 사실 그 내용이 명칭과 일치하지도 않는다. 핵심은 새로운 국제질서에 대응해 미국의 힘을 강화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중산층을 재건하고 제조업을 부활시키고 해외로 나간 기업들을 다시 불러오려 한다. 기술발전을 위해 과학과 교육의 생태계 변화도 강조한다. 이에 더해 동맹국들과 전략 파트너 국가들과 협력을 강화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이들의 도움을 받아 미국의 이익을 챙기려 하고 있다.

중장기 투자에 임하는 것은 중국도 마찬가지이다. 3연임에 성공한 시진핑 주석은 여전히 중국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강력한 리더십 하에 경제체질 개선, 공산당의 리더십 강화, 혁신 기술의 발전 등을 추진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중국의 국력이 정점을 지나 약화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하지만 강력한 공산당 리더십 하에 새로운 도약의 전기를 마련할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심지어 북한도 5년 단위의 경제발전 계획, 군사력 증강 계획, 그리고 강력한 당 주도 체제와 사상 강화 등의 변화를 보이고 있다. 미중 전략경쟁 환경을 소위 신냉전으로 인식하고 북중 관계 강화를 도모하는 한편, 우크라이나전쟁으로 위기에 처한 러시아를 도우며 실익을 챙기고 있다.

새로운 도전, 한국의 미래 결정할 것

급격한 세계질서의 변화 속에 중장기 전략을 꾸준히 수행하는 국가들 간의 미래 판도는 예측하기 어렵다. 한국은 과연 향후 10년을 내다보고 현명한 준비를 하고 있는가. 세계질서의 변화를 반영하는 혁신적인 정책 명칭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복잡한 이름의 입법안을 들어보기 어렵다. 북핵문제나 미중경쟁 등 당면한 외교 과제를 슬기롭게 극복하는 것이 물론 중요하고, 눈앞에 닥친 경제위기를 이겨나가는 것도 반드시 해야 할 일들이다. 그러나 당면과제들을 유발하는 배후의 거시 이행을 이해하고 대비하는 일 역시 급박한 상황이 됐다.

급격한 변화 속에서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한국의 잠재력은 뛰어난 인력을 갖춘 민간 부문에 상당 부분 존재한다. 한국은 현재 반도체 배터리 등의 자산을 활용해 역사적으로 유례없이 전략적 자율성을 누리고 있다. 정부 이외의 기업, 과학계 등 민간의 성과에 힘입은 바 크다.

정부는 세계질서의 변화를 인식하고 대처하면서 정책 수립의 생태계를 다각적으로 확대해야 한다. 자문기구 위원회 민관협의체 등 지식네트워크 국가의 면모를 보여야 한다. 정부는 아무래도 단기, 당면과제에 집중할 수밖에 없으므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정책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국회 역시 중장기 국력 강화를 위한 입법 방향 수립과 초당적인 협력을 확보하여 정권교체에도 불구하고 지속될 수 있는 입법문화를 만들어가야 한다. 한국이 이룬 성과도 눈부시지만 새로운 도전은 앞으로 한국의 운명을 또 한번 급격하게 바꾸어 놓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