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중산층 난방비 일괄지원 배제' 가닥 잡았다

2023-02-09 11:02:39 게재

조단위 추경 편성하면 물가자극·재정건전성 하락

국가신인도 하락 우려도 … 취약계층 지원에 무게

정부가 윤석열 대통령 지시로 촉발된 중산층 난방비 일괄지원을 하지 않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대신 취약계층을 집중지원하고 자영업자 등 추가지원이 필요한 부문이 있는지는 시간을 두고 검토하기로 했다.
추경호 부총리와 대화하는 한덕수 국무총리 | 한덕수 국무총리와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7일 오후 열린 국회 경제분야 대정부 질문에서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정훈 기자


중산층까지 난방비 지원을 하려면 조단위 예산투입이 불가피해 국가 재정건전성을 해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는 대외신인도 하락으로 이어져 가뜩이나 어려운 수출과 경기회복에도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판단이다. 정부의 이런 방침은 대통령실과도 정책조율을 거쳤다는 후문이다. 9일 정부 관계자는 "중산층까지 난방비를 지원하는 선례를 만들게 되면 정부 재정운용과 국가신인도에 나쁜 영향을 줄 수 있고, 조금씩 잡혀가는 물가도 자극할 수 있다"면서 "재정건전성을 지키면서 국민 부담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조합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야당은 물론 여당 일각에서도 '중산층 추가 지원'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어 정부방침이 관철될 지는 지켜봐야 한다. 특히 이달 중순쯤 '1월 난방비 고지서' 발송되면 '난방비 폭탄' 여론이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될 수 있어 관계당국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경제 악영향 우려 = 정부가 '중산층 난방비 지원' 배제로 가닥을 잡은 이유는 경제 때문이다.

한국경제의 버팀목 역할을 했던 수출마저 적자를 기록하면서 올해 성장률은 1%중반대로 추락할 전망이다. 9일 산업부에 따르면 지난달 수출은 전년 동월 대비 16.6% 줄어든 462억7000만달러를 기록했다. 무역수지는 126억9000만달러 적자다. 수출은 4개월째 내리막을 걷고 있고 무역적자는 역대최대다.

정부가 연초부터 수조원대 추가경정예산(추경)을 편성하면 국채를 추가 발행할 수밖에 없다. 지난해 4월 중앙정부 기준 국가채무 잔액은 사상 처음 1000조원을 넘어섰다. 당시 소상공인 코로나19 손실보상을 위한 62조원 규모 2차 추경을 고려한 연말 국가채무는 1068조8000억원,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은 49.7%에 달한다. 올해 국가채무비율 전망은 50.4%로 당장 국가 재정 관리에 집중해야 한다는 게 정부 입장이다. 국채 비율이 늘면 글로벌 시장에서 대외신인도가 하락하고 수출에도 나쁜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한덕수 국무총리가 지난 7일 국회 답변에서 "인기 위주 정책으로 (난방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지금 우리 재정은 대외적인 신인도 차원에서도 그렇고 누적된 국가부채를 안정화시켜야 되는 절대절명의 과제를 갖고 있다"고 말한 것도 이런 맥락으로 풀이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편성됐던 재난지원금과 같은 지원 방식에 분명히 선을 그은 것이다.

실제 우리나라 경제 사정은 시간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최근 국제통화기금(IMF)이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수정하면서 주요국 가운데 유독 한국의 성장률 전망치만 종전보다 0.3%p 낮은 1.7%로 제시했다. 반면 세계 경제 성장률은 기존 2.7%에서 2.9%로 0.2%p 상향조정했다. 선진국 성장률도 기존 1.1%에서 1.2%로 높여 한국과 대조를 이뤘다.

◆국가재정지출에 대한 위험한 선례 = 추경편성으로 대규모로 돈이 풀리면 물가를 자극할 것이란 점도 부담이다. 지난달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5.2%를 기록, 석 달 만에 상승폭이 확대된 가운데 공공요금 인상도 향후 줄줄이 대기 중이다. 당분간 5%대 고물가가 장기화할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시중에 대규모로 돈이 풀릴 경우, 물가가 들썩일 수 있고 이는 서민층에 더 큰 피해를 줄 수 있다고 정부는 보고 있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올해 초부터 최근까지 추경 편성을 검토하지 않는다고 못 박은 이유도 1000조원대로 늘어난 국가채무나 물가 상황이 심각하다는 판단에서다. 기재부 관계자는 "대규모 돈 풀기로 추경을 편성하면 물가를 자극하고 그 부담은 결국 고스란히 국민들이 지게 된다"고 우려했다.

중산층 난방비 지원이 국가재정지출에 대한 '위험한 선례'가 될 수 있다는 점도 정부의 고민이다. 현행 국가재정법은 전쟁이나 대규모 실업 등 재난 상황으로 기존 예산에 수정이 필요할 경우에만 추경편성을 허용하고 있다. 최근의 '난방비 부담 확대'를 국가재난상황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의견이 엇갈릴 수 있는 대목이다. 코로나19 상황과는 위기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정부는 취약계층과 자영업자에 대한 추가 지원방안, 이자를 정부가 지원하되 난방비 납부를 나눠내는 방안 등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재원 조달 쉽지 않다 = 앞서 정부는 이미 취약계층 난방비 지원에 예비비 1000억원과 기존 예산 800억원 등 총 1800억원을 투입하기로 한 바 있다.

정부 지원을 구체적으로 보면 기초생활수급자와 차상위계층은 2022년 12월~2023년 3월 난방비를 세대당 59만2000원 지원받는다. 또 기초생활수급가구와 노인질환자 등 취약계층 117만6000가구에 올겨울 에너지바우처 지원금을 15만2000원에서 30만4000원으로 2배 인상했다.

여기에 전 국민의 60%를 차지하는 중산층까지 지원할 경우 조 단위 예산이 투입될 수밖에 없다. 통상 소득을 기준으로 하위계층 20%, 중산층 60%, 상위계층 20%로 구분한다. 난방비를 중산층까지 지원할 경우 결국 전 국민의 80%에게 자금을 지원하게 된다.

실제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발표한 중산층은 2021년 기준 61.1%다. 처분가능소득 기준으로 중위소득 50∼150% 기준이다. 8일 현재 우리나라 가구수는 2144만 8463가구다. 추가지원 대상을 전체 가구의 60%만 잡아도 약 1300만 가구에 달한다. 더불어민주당이 에너지 물가 지원금으로 7조2000억원의 추경을 언급한 것도 편성된 정부 예산만으로 감당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성홍식 기자 ki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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