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현장 리포트

실리콘밸리의 사회·문화 배경을 이해해야 하는 이유

2023-05-16 11:00:00 게재
김욱진 코트라 실리콘밸리무역관 차장

실리콘밸리를 기술의 최첨단으로만 보는 시각이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이다. 이를 넘어서 사회·문화·정치·종교적으로 베이 지역의 변화 흐름을 인식할 수 있다면 한국식 혁신의 실마리를 잡기가 한결 수월할 것이다.

문화가 혁신을 낳는다. '생각을 빼앗긴 세계'의 저자 프랭클린 포어는 책에서 실리콘밸리의 기원을 다루며 말한다. "혁신은 마술처럼 갑자기 나타나거나 단순히 과학적 논리대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문화가 혁신을 낳는다"고 말이다. 실리콘밸리 생태계의 형성에는 정치·경제·사회·군사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지만 학술·문화적 배경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세계 최고 수준의 대학을 둘이나 보유한 까닭에 세상을 새롭게 하려는 인재들을 자연스럽게 품을 수 있었다.

두개의 종합대학은 바로 스탠퍼드와 UC버클리다. 산학협력의 시초로 알려진 스탠퍼드대학과 자유발언운동(Free Speech Movement)으로 대표되는 사상의 진보를 이끈 UC버클리는 실리콘밸리 생태계를 떠받치고 있는 공고한 학문적 대들보다. 지표로 봐도 그렇다. 경제지 포브스가 매년 발표하는 미국대학 순위에서 2021년 1위는 UC버클리, 4위는 스탠퍼드였다. 지난해에는 MIT에 이어 스탠퍼드와 UC버클리가 공동 2위를 차지했다. 아이비리그로 상징되는 미국 동부의 명문대학 연합에 견줄 만한 지식공동체가 미국 서부, 특히 실리콘밸리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실리콘밸리 형성 배경이 된 반문화

필자는 지난 주말 샌프란시스코와 산호세를 연결하는 광역철도를 타고 UC버클리를 찾았다. 미국에서 공부한 적은 없지만 대학이 주는 자극이 필요할 때마다 애써 캠퍼스를 방문한다. 안정되고 정갈한 스탠퍼드대학보다는 역동적이고 한껏 자유로움이 느껴지는 UC버클리의 분위기에 끌리는 게 사실이다. 이번 방문에는 특별한 목적이 있었다. 5월 6일부터 이틀 동안 버클리 시내에서 제9회 베이 지역 도서축제가 열렸기 때문이다. 생성형 인공지능과 경쟁해야 하는 이 시대의 인간에게 책이 무슨 의미인지 힌트를 얻고 싶은 욕구가 컸다. 사실 이건 표면적인 이유다. 싱어송라이터이자 인권운동가인 조안 바에즈(Joan Baez)가 연사로 나선다는 소식을 듣고 무엇보다 마음이 동했다.

1960~1970년대를 풍미한 포크가수 조안 바에즈는 젊은 시절 밥 딜런과 스티브 잡스의 연인으로도 유명하다. 실리콘밸리의 역사를 통시적으로 되짚어보기를 즐기는 필자에게는 그녀가 고등학생 시절 행동으로 옮긴 '시민불복종'(civil disobedience)이 무엇보다 깊은 인상으로 남았다. '월든'의 작가이자 철학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주창한 그 '시민불복종' 말이다.

때는 1958년 2월 6일, 장소는 스탠퍼드대학 캠퍼스가 있는 팔로알토(Palo Alto)다. 팔로알토 고등학교를 다니던 조안 바에즈는 졸업을 한해 앞두고 프랑스어 수업 중 재난대비 방위훈련에 동참하라는 요청을 받는다. 거창하게 들리지만 전교생이 학교를 일찍 파하고 집에 가서 지하실에 숨는 방식으로 훈련은 진행됐다. 많은 학생들이 이 훈련을 오후 하우스파티에 가는 기회로 받아들였지만 바에즈는 하교를 거부하고 교실에 남았다.

물리학 교수였던 아버지도 재난대비 방위훈련이 전혀 실효적이지 않다며 고등학생 딸을 지지한다. 조안 바에즈의 하교 거부 소식은 다음날 지역언론 '팔로알토 타임스'에 비중있게 실리며 그녀는 유명세를 얻는다. 반문화(反文化, counterculture)를 상징하는 포크가수로서의 저항적 행보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실리콘밸리의 탄생을 언급할 때 간과하기 쉬운 부분이 바로 반문화의 역할이다. 스탠퍼드대학 커뮤니케이션학 교수인 프레드 터너(Fred Turner)는 2006년 발간한 책 '반문화에서 사이버문화로'(From Counterculture to Cyberculture)에서 실리콘밸리 생태계가 만들어지는 데 정서적 배경이 된 반문화를 탐구한다. 아쉽게도 이 책은 아직까지 한국에 번역·출판되지는 않았다. 터너에 따르면 1950년대 비트문학(Beatnik) 사조를 이끌었던 샌프란시스코, 1960년대 자유발언운동의 중심이 된 버클리로 젊은이들이 모여들면서 세상을 바꾸려는 일련의 흐름이 베이 지역에 형성된다.

1970년대 실리콘밸리 히피세대의 교본과 같은 책이 '홀어스카탈로그'(Whole Earth Catalogue)다. '도구로 접근하는 통로'라는 부제가 붙은 이 잡지는 개인용 컴퓨터로 새로운 세계를 꿈꾸던 당시 청년들에게 큰 영감을 불어넣었다. 영향을 받은 대표적 인물이 스티브 잡스다. 그는 스탠퍼드대 졸업축사에서 '홀어스카탈로그'를 종이판 구글로 칭하며 마지막 발간본 구호인 "늘 배고프게, 늘 우직하게"(Stay Hungry, Stay Foolish)로 연설을 마친다.

기술과 예술의 만남, 주류와 거리두기

기술로 다른 세계를 상상하던 초창기 실리콘밸리의 사람들에게 예술로 자극을 준 조안 바에즈를 만난다는 설렘은 곧 실망으로 바뀌었다. 시간에 맞춰서 버클리의 '화물과 구조'(Freight and Salvage) 공연장으로 찾아갔지만 이미 표는 매진됐다. 혹시 신용카드는 받지 않을지 몰라 준비한 15달러를 쥐고 있는 손이 머쓱해 보였다. 안타까운 마음을 뒤로한 채 매표소를 빠져나와 버클리 시내를 정처 없이 걸었다.

문득 근래에 읽었던 책 하나가 떠올랐다. 잡스와 함께 픽사를 설립한 창업자 에드 캣멀의 책 '창의성 주식회사'(Creativity Inc.)다. 한국어로는 '창의성을 지휘하라'는 제목으로 번역됐다. 이 책에서 캣멀은 픽사의 스튜디오가 생뚱맞은 곳에 자리잡은 이유를 설명한다. 픽사 본사는 버클리와 인접한 에머리빌(Emeryville) 지역에 있는데, 공장지대 한가운데에 첨단산업 스튜디오가 들어선 셈이다. 한창 바에즈의 강연이 진행되는 동안 픽사로 발걸음을 돌렸다.

2000년 에머리빌 캠퍼스로 옮기기 전까지 픽사는 더욱 외딴곳에 있었다. 에머리빌에서 20㎞ 떨어진 포인트 리치먼드 시절, 픽사에서는 창밖으로 굴뚝과 파이프와 육중한 기계가 보였다. 맞은편에 셰브런 정유공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픽사는 왜 후미진 곳에 터를 잡았을까. 에드 캣멀은 '창의성 주식회사'에서 픽사의 캠퍼스를 이렇게 묘사한다. "실리콘밸리와 할리우드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장소에 섬처럼 떨어진, 영화나 컴퓨터 산업 문화에 치우치지 않고 영화산업 인재도 컴퓨터산업 인재도 두루 포용할 수 있는 커뮤니티"라고 말이다.

1995년 세계 최초로 100% 컴퓨터그래픽 장편 애니메이션을 선보이며 세상을 놀라게 한 픽사가 반문화의 조류를 이끌었던 버클리 근교에서 작업을 지속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기술과 예술의 만남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창조하려는 이들에게 기존의 문법과 주류의 시각은 거리를 유지해야 할 대상이었다. 이는 1970년대 반문화가 지향했던 가치와 적확히 일치한다.

베이지역 배경 봐야 혁신 실마리 풀려

픽사뿐 아니라 많은 실리콘밸리 빅테크 회사들은 여전히 반문화 가치를 기업 철학으로 내세우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커다란 부를 축적했음에도 '다름을 생각하라'고 속삭이고 '사악해지지 말자'고 말한다. 한발 나아가 이제 문화를 넘어 종교적 가치까지 기업 안에서 소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UC버클리의 사회학 교수 캐롤린 첸(Carolyn Chen)은 지난해 발간한 책 '일하고 기도하고 코딩하라'(Work Pray Code)에서 '실리콘밸리의 일이 종교가 되어가는' 현상을 탐구한다. 캠퍼스에 명상 요가 마음챙김 공간을 만들어 직원들이 평온한 상태로 일할 수 있도록 돕는 차원을 넘어 "세상을 구한다"는 회사의 비전과 직원들의 자기실현 의지를 동일화하려는 빅테크 기업의 시도를 분석하고 있다.

실리콘밸리를 기술의 최첨단으로만 보는 시각이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이다. 이를 넘어서 사회·문화·정치·종교적으로 베이 지역의 변화 흐름을 인식할 수 있다면 한국식 혁신의 실마리를 잡기가 한결 수월할 것이다. 특히 한명의 애서가로서 스탠퍼드나 UC버클리에서 발간된 실리콘밸리의 여러 면모를 다룬 책이 보다 많이 번역 출판되었으면 좋겠다.

김욱진 코트라 실리콘밸리무역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