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시장도 접수하는 일본의 고령자

2023-08-16 11:10:47 게재

인구 30%, 소비 40%, 취업자 10% 이상 차지 … 일본 '2025년 문제' 한국 '2033년 문제'

일본에는 80세를 넘겨 전자제품 판매점에서 일하고 있는 고령의 여성노동자가 있다. 심지어 90세를 넘긴 나이로 한 직장에서 67년간 근속을 이어가며 전세계 최고령 총무과장으로 기네스북에 오른 사람도 있다.

일본에서는 80~90세가 넘어서도 일을 하는 사례가 단순히 미담에 그치지 않는다. 일본은 이미 소비시장의 40%를 임금생활자가 아닌 연금생활자가 차지하고 있다. 이제 노동시장도 고령자가 접수하고 있다.


82세 가전판매점 사원, 92세 총무과장

올해 3월 일본의 한 대형 출판사가 내놓은 '82세 가전판매점원, 손님맞이는 천직입니다'라는 책이 화제다. 일본 가전판매점 '노지마' 사이타마현 가와구치시 영업점에서 일하는 구마가이 에미코씨의 인생 첫 저작이기도 하다. 구마가이씨는 책을 통해 △손님을 맞는 일에 대한 즐거움 △건강하게 살기 위해 필요한 노동과 취미생활 △가능하면 평생 일하고 싶은 마음 등을 자신의 하루 일과와 함께 전했다.

그는 현재 직장에서 주4일 근무로 오전 9시 30분부터 상품을 옮기고 진열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오전 10시 개점과 함께 상품의 재고를 관리하고, 진열장에 상품을 보충하는 일도 그의 몫이다. 주로 고령자 손님을 상대로 매장을 안내하고, 상품을 설명하면서 직접 판매도 한다. 근무는 오후 3시면 마친다. 안도 신지 지점장은 "직원과 고객에 대한 배려심과 일을 처리하는 데서 젊은 직원이 따라 배울 게 많다"고 말한다.

구마가이씨는 59세부터 노지마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노지마는 2020년 희망하는 사람에 대해 80세까지 일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다 구마가이씨가 80세 되던 2021년 아예 나이 상한을 없앴다. 그는 이 회사 '80세 이상 계속 근무자 1호'이다. 현재 노지마 종업원 가운데 80세 이상 3명, 70세 이상은 30여명에 이른다.

이 회사 타지마 유타카 이사는 니혼게이자이신문과 인터뷰에서 "연령으로 일할 수 있는 한계를 두는 것은 '인생 100세 시대'에 걸맞지 않다"며 "고령자를 적절히 활용하지 못하면 커다란 손실"이라고 말했다. 구마가이씨는 "하루 일을 마치면 스스로 자신감이 생긴다"면서 "사회로부터 소외받지 않으면서 무엇인가 역할을 계속 하고 싶다"는 희망을 드러냈다.

오사카에서 나사 등 공구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산코인더스트리'의 다마키 야스코 총무과장 이야기는 지나치게 극단적일 정도로 화제가 됐다. 다마키씨가 90세이던 2020년 기네스북에서 '세계 최고령 총무부장'으로 공식 인정했다. 그는 1956년 이 회사 전신인 '산코흥업'에 입사해 지금까지 67년간 근무하고 있다. 주로 경리 및 서무업무를 담당하는 다마키 과장은 엑셀 등도 능숙하게 다룬다. 주 5일제로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풀타임 근무하고 있다. 앞서 구마가이씨가 파트타임으로 비정규사원인 점과 달리 한 직장에서 줄곧 풀타임 정규사원으로 계속 일한다. 다마키 과장은 기네스북에 이름을 올려 화제가 됐을 당시 언론인터뷰에서 "일은 생활리듬의 하나로 나에게 정년은 없다"고 말했다.

고령자 없으면 경영 불가능한 택시업계

일본 동북지역에 있는 아키타현을 거점으로 한 택시회사 '우키타산업교통'은 전체 25명의 택시운전자 가운데 절반이 65세 이상이다. 이 회사 우키타 타다카츠 사장은 "구인에 응모하는 사람이 두달에 1명 정도"라며 "젊은 사람은 아키타현 밖으로 나가고, 고령자가 없으면 경영이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최근 '직장의 존속, 승부수는 고령자'라는 보도를 통해 일본의 고령노동자 실태를 전했다. 일본은 전체 인구에서 생산가능인구(15~65세)가 지난해 기준 59%로 2000년도에 비해 9%p 하락했다. 일본 인구가 1억2000만명 수준임을 고려하면 최근 20년 동안 1200만명 가량의 노동력이 줄어든 셈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최근 초엔저로 외국인 노동자의 확보도 어려워졌고, 보육중인 여성의 노동참여 확대도 한계가 있다"며 "줄어드는 노동가능인구세대를 보완하려면 고령자 채용으로 활로를 모색할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이러한 사정은 세부 지표로도 나타난다. 일본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일본의 전체 임금노동자 가운데 65세 이상 비율은 2022년 기준 10.6%(639만명)로 역대 최대 수준이다. 업종별로 살펴보면 인력부족이 특히 심각한 건설이나 요양 및 돌봄 관련 업종은 15%에 이른다. 운수업종도 10%를 넘는다. 특히 택시와 버스업계에 국한하면 65세 이상이 30%에 이르는 수준이다.

이처럼 생산가능인구가 줄어들면서 일본 정부와 기업들은 고령자 채용을 적극 장려하고 있다.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본인의 의사만 있으면 70세가 넘어서도 일할 수 있는 기업이 지난해 기준 39%로 10년 전에 비해 두배로 늘었다. 정년을 의무적으로 65세로 정한 기업도 같은 기간 12%에서 25% 수준까지 증가했다.

한편 고령자 고용이 늘면서 산업재해 문제가 부상하고 있다. 지난해 60세 이상 노동자의 산업재해 발생건수는 약 3만8000건으로 5년 만에 26% 증가했다. 증가율은 다른 연령대에 비해 평균 3배나 높다. 체력이나 집중력이 저하돼 젊은 세대라면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사고도 당하는 경우가 많다는 분석이다.

낮은 임금수준도 문제다.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최근 10년간 65~69세의 평균임금은 6% 증가했지만, 70세 이상은 9% 감소했다. 사카모토 유지 리쿠르트연구소 연구원은 "기업이 고령자를 지속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자동화 투자 등을 통해 부담을 적게하고, 임금 등 노동조건의 개선을 위해 정부와 산업계, 기업의 공동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일본, 장기간 걸쳐 고용·복지시스템 정비

일본 언론은 '2025년 문제'라는 용어를 자주 쓴다. 태평양전쟁 패전 이후 1947~1950년 사이에 태어난 베이비붐세대(단카이세대)가 모두 75세 이상인 후기고령자(65~74세의 전기고령자와 비교되는 개념)에 진입하면서 생기는 △노동 △연금 △의료 △돌봄 등의 문제가 집약적으로 폭발할 것으로 보고 그 상징적인 해가 2025년이 될 것임을 강조하기 위한 신조어이다.

이를 위해 일본정부와 기업, 노조는 오랜 기간에 걸쳐 노동·복지시스템을 정비해왔다. 대표적으로 2013년 이후 후생연금 수급개시 연령을 3년마다 한살 늦춰 2025년부터 65세에 지급한다. 근로자 정년도 사업장 규모 등에 따라 단계적으로 한살씩 연장해 2025년부터 모든 사업장이 '정년 65세'에 돌입한다. 이밖에도 의료비의 자기부담 인상 등 복지시스템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제도정비를 꾸준히 모색했다.

일본은 '잃어버린 30년'이라고 불리는 장기 저성장·저물가의 굴레에서 아직도 확실히 벗어났다고 확언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일본사회 특유의 '안전제일주의'가 경제 및 사회복지제도의 점진적 개선을 통해 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려 했다는 점에 주목한다.(박상준 와세다대학 교수)

한국은 인구구성 측면에서 빠르게 일본을 따라가고 있다. 일본의 65세 이상 인구는 지난해 29%를 넘어섰고, 2040년 35%에 이를 것이라는 관측이다. 일본은 특히 75세 이상 인구가 2025년 18%를 넘어설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한국은 통계청이 6월 발표한 장래인구추계에 따르면 65세 이상 인구 비중은 올해 18.4%, 75세 이상은 7.7%에 이를 것으로 예상했다. 2037년이면 65세 이상이 31.9%, 75세 이상은 16.0%에 달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한국은 '2033년 문제'가 사회적 화두로 부상하고 있다. 인구추계상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의 30%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되고, 국민연금 수급개시 연령이 2033년부터 65세로 늦춰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정년 연장 △연금제도 개혁 △의료 및 돌봄 문제 등을 정비해 지속가능한 공동체를 위한 시스템 정비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다.

한국노총이 지난달 주최한 국제세미나에서 모투 고스케 일본노총 노동법제국장은 "고령자 고용안정 확보와 노동의 가치에 걸맞는 처우 실현을 위해 기반을 정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전진호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지난달 '일본 정년제도의 변화와 시사점'이라는 보고서에서 "주요 선진국 중 노동관련 법령에 민간부문 종사자에 대한 별도의 정년규정을 두는 나라는 우리나라와 일본밖에 없다"며 "일본의 정년연장 방식은 향후 우리나라 입법과정에서 중요한 참고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백만호 기자 hopebaik@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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