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들은 읽는다
행동독서회 "책 읽으며 도서관 검열 반대합니다"
도서관 열람제한 및 폐기 요구받은 책 함께 읽는 "즐거운 저항" … "민원 정치, 소수 목소리 과대포장 안돼"
13일 오후 7시 서울 교보문고 광화문점 앞 길목에서 성평등 성교육 성소수자와 관련된 책들을 읽는 시민 20여명을 만날 수 있었다. 이날 만난 시민들은 '특정 단체가 도서관에 열람제한과 폐기를 요구한 117종의 책 중 1권씩을 갖고 나와 함께 모여 읽자'는 온라인을 통한 '행동독서회 제안'에 뜻을 같이 했다.
실제로 최근 특정 단체의 민원 이후 일부 공공도서관에서 해당 책 중 일부가 열람제한된 사실이 확인돼 논란이 되고 있다. 시민들은 특정 단체의 도서관 검열과 금서 지정 요구에 반대하며 해당 책들을 함께 읽는 방식으로 목소리를 냈다.
◆"열람제한과 폐기 요구, 심각한 문제" = 행동독서회를 제안한 사람은 청소년책편집자 양선화씨다. 그는 '00책협동조합'의 초대 공동대표로 활동하면서 조합원으로 다양한 행동독서회에 참여해왔다.
00책협동조합은 1인 출판사(생산자) 편집자(노동자) 책방(유통사) 독자(소비자) 등 삶에서 책이 중요한 사람,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다양한 활동을 했던 협동조합이다.
행동독서회는 책을 읽음으로써 목소리를 내는 '독서시위'라고 할 수 있다. 00책협동조합은 사회적 현안이 있을 때 종종 행동독서회를 열었다.
양씨는 제안에 대해 "근무하는 출판사의 책이 목록에 포함되면서 특정 단체가 조직적으로 도서관에 성평등 성교육 관련 어린이청소년책 117종에 대해 열람제한과 폐기를 요구한다는 것을 알았다"면서 "일반 독자들은 관심을 갖지 않으면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을 알기 쉽지 않고 개별 도서관들은 이와 같은 민원에 대응할 힘이 없기 때문에 심각한 문제"라고 말했다.
이어 "행동독서는 모여서 책을 읽음으로써 목소리를 내고 저항을 하는 집회의 한 방식이며 굉장히 즐거운 방식"이라고 덧붙였다.
아울러 양씨는 청소년책편집자로서 "어린이청소년책은 사실 출판계에서 주목을 받는 분야는 아니다. 특정 단체에서 어린이청소년책에 대해 도서관 열람제한 등을 요구했다고 하니 오히려 어린이청소년 출판의 중요성을 반증하는 느낌"이라면서 "성인이 책을 읽어 변화하기는 쉽지 않지만 어린이 청소년 때 읽은 책은 실제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 이번 기회에 어린이 청소년 출판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당사자인 어린이들도 함께 = 이날 초등학교 3학년, 유치원생 자녀 2명과 함께 책을 읽으러 나온 어머니 허윤정씨를 만날 수 있었다. 허씨는 스마트폰을 꺼내 자녀들이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를 들고 찍은 사진을 보여줬다.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는 도서관 열람제한과 폐기를 요구받은 117종에 포함됐다.
허씨는 "아이들이 7살, 4살 때였는데 엄마가 너무 좋으니까 끊임없이 안고 부비고 사랑한다고 얘기했다"면서 "그때 자녀들이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를 읽으며 엄마 뱃속에서 어떻게 태어났는지 이해하게 됐다. 사진 속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당시 아이들이 이 책을 읽으며 너무 행복해했다"고 말했다.
117종의 책들이 어린이청소년책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허씨의 자녀들은 어린이 당사자로서 행동독서회에 참여한 셈이다. 행동독서회에 자녀들과 함께한 것에 대해 허씨는 "자녀들에게 특정 단체의 민원에 대해 알려줬고 행동독서회에 대해 설명해 주며 '참석해서 신나게 책을 읽어볼까'라고 제안했다"면서 "자녀들이 특정 단체의 활동에 대해 '이해가 안 간다'면서 '함께 가자'고 해 용인 수지에서 1시간 30분 걸려 같이 왔다"고 말했다.
이선우(9) 이진우(6)군은 "성평등에 관한 책을 갖고 와 읽었다"면서 "함께 모여 책을 읽으니까 즐거웠다"고 말했다.
◆저자도 참여 "시민 관심 필요" = 이날 행동독서회에는 117종에 포함된 책을 집필한 저자도 함께 했다. '성평등'을 쓴 손희정 경희대 비교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다.
손 교수는 "117종의 책들을 보면 '차이를 차별로 만들지 말자' '각자의 다름을 인정하자' '각자에게 기질이 있다'는 주제를 가진 책들이 굉장히 많다"면서 "한국 사회 전반적으로 차별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어지고 평등이 가치 없는 것이 된다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우리 사회에서 평등에 대해 얘기하는 게 어려워졌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손 교수가 이날 읽은 책은 '트랜스젠더 이슈'라는 책이다. 그는 "사람을 고정관념에 따라 이분법으로 나누고 '그것이 자연'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라면서 "사회가 만들어놓은 틀에 들어가지 않고도 '나다움'을 충분히 추구할 수 있다는 게 성평등의 가치"라고 말했다.
특정 단체의 민원과 관련해 손 교수는 "도서관은 공공성을 가진 공간인데 민원을 넣고 정치인들을 움직여 입김을 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현 정부가 강조하는 자유를 해치는 것"이라면서 "민원 정치에서는 소수의 목소리가 과대포장되는데 아주 소수의 사람들이 시대정신을 역행해서 성평등을 해치려 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말했다.
이어 "공공기관뿐 아니라 학교 등 공공교육의 장에서 민원이 작동해 성평등교육 성교육을 못하게 되면 학교나 공공기관에서만 관련 내용을 배울 수 있는 사람들은 그런 교육에서 완전히 배제된다"면서 "지금의 상황에 대해 시민들이 많은 관심을 갖고 목소리를 내길 바란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