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니뇨와 지구온난화의 위험한 만남
영국 이코노미스트지 "가난한 국가들과 원자재시장에 큰 혼란 불가피"
지난 21일 멕시코에서 불어닥친 열대성 폭풍 '힐러리'로 미국 로스앤젤레스와 샌디에이고의 강우량 기록이 경신됐다. 내륙에 위치한 데스밸리는 보통 1년 동안 내리는 양의 비가 하루에 쏟아졌다.
허리케인과 열대성 폭풍이 캘리포니아를 강타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1997년 이후 한번도 이곳에 근접하지 않았다. 육지에 상륙한 사례는 저 멀리 1939년까지 거슬러오른다. 힐러리 등 캘리포니아에 상륙한 몇 안되는 태풍 대부분은 전세계적으로 열과 습기를 재분배하면서 일시적으로 지구기온을 상승시키는 엘니뇨와 일치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 최신호에 따르면 기상학자들은 지난 6월 시작된 현재의 엘니뇨가 2016년을 역대 가장 더운 해로 만든 엘니뇨만큼 강력할 것으로 예측한다. 이 예측이 맞다면 올해 또는 내년에 더위 기록이 깨질 것은 거의 확실하다. 네덜란드 기상청 국장 마틴 반 알스트는 "우리는 지금 미지의 바다에 있다"며 "지구온난화와 엘니뇨가 함께 발생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엘니뇨는 적도 남쪽으로 부는 무역풍과 그 아래 바다 사이의 상호 작용으로 형성된다. 그 결과 평균보다 더 뜨겁거나 차가운 물, 대기 중 고기압 또는 저기압이 축적되면서 기온과 바람, 강우량에 영향을 미친다. 열대 태평양은 거대하기 때문에 해수면이 1~2℃만 더 따뜻해져도 지구 기후에 큰 영향을 미친다. 더 많은 물이 증발해 대기 상층을 따뜻하게 하고 열대성 뇌우를 일으킨다. 대류는 이 추가 에너지를 적도 양쪽의 북쪽과 남쪽의 더 추운 지역으로 운반한다. 지구 자전으로 에너지가 동쪽과 서쪽으로도 퍼진다. 그 결과 열과 수분이 광범위하게 재분배된다. 기후 전문용어로 엘니뇨가 전세계 기상 시스템을 '원격연결'(teleconnection)한다고 이른다.
엘니뇨의 다양한 결과들
엘니뇨의 결과는 때로 치명적이었다. 2018~2019년 비교적 온화한 엘니뇨로 호주 역사상 최악의 산불이 발생했다. 2014~2016년 이례적으로 강력한 엘니뇨는 가뭄과 홍수를 몰고와 전세계 약 6000만명의 식량이 부족해졌다. 남미 전역에 지카바이러스가 대규모로 발생했고, 호주산호초 군락의 29%가 표백됐다.
때로는 이점을 주기도 한다. 올해 아르헨티나에 내린 비로 오랜 가뭄이 해소돼 곡물 생산량이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엘니뇨가 발생한 해에는 일반적으로 대서양 허리케인 시즌이 온화해져 재산과 농작물 피해가 줄어든다. 엘니뇨의 영향은 어업과 농업을 넘어선다. 2015년 전세계 리튬 생산량의 30%를 차지하는 칠레 북부의 한 리튬 공장이 폭우로 생산차질을 빚었다.
이러한 다양성 때문에 엘니뇨의 전반적인 영향을 평가하기는 어렵다. 2016년 국제통화기금(IMF) 연구에 따르면 엘니뇨는 긍정 부정 어느 쪽이든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올해 초 스탠퍼드대 크리스토퍼 칼라한과 다트머스대 저스틴 맨킨이 사이언스지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1982~83년과 1997~1998년의 엘니뇨 주기가 전세계 GDP를 각각 4조1000억달러와 5조7000억달러 줄였다. 첫번째 주기는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가 금리를 인상하던 시기와 일치했고, 두번째 주기는 아시아 외환위기와 맞물렸다. 이코노미스트지는 "두 시기 모두 엘니뇨가 발생하면서 전혀 관련 없는 다른 요인들도 신흥시장 경제성장을 억제했다. 이러한 다양한 사건의 영향을 세분화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전했다.
하지만 대부분 분석들에서 부유한 국가보다 가난한 국가가 엘니뇨로 더 큰 타격을 받았다는 데엔 이견이 없다. 전반적인 영향이 거의 없다는 IMF 연구에서도 개발도상국의 농업 부문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다만 미국 등의 농업생산량 증가로 전세계적 차원에서 상쇄됐을 뿐이다.
엘니뇨가 심할수록 그 영향은 더 커진다. 미국 기상청 NOAA의 최신 예측에 따르면 현재 엘니뇨가 '강할' 확률은 66%다. 이번 엘니뇨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새로운 극단을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
첫째, 엘니뇨의 반대 현상인 라니냐가 3년 연속 발생한 직후라 바람이 따뜻한 태평양 물을 평소보다 더 강하게 서쪽(아시아 방향)으로 밀어내 일시적으로 지구 기온을 낮출 수 있다. 라니냐 기간 동안 지배적인 바람 패턴은 열을 바다 깊숙이 밀어 넣는 경향이 있다. 그 열의 일부는 후속 엘니뇨 기간 동안 다시 상승한다. 3년 연속 라니냐가 발생했다는 것은 더 많은 열이 방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전세계 바다에 열을 저장하는 것은 라니냐뿐만 아니다. 두번째 요인인 지구온난화도 마찬가지다. 수십년 동안 연구자들은 해수면뿐 아니라 최대 2000m 깊이의 수온을 측정해 왔다. 1990년대 이후 심해 수온은 계속 상승하고 있다. 지구온난화가 엘니뇨를 더욱 악화시킬 것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영국 기상청의 장기예보 책임관인 애덤 스케이프는 "기후변화가 진행됨에 따라 특정 엘니뇨의 영향력은 더 커진다"고 말했다. 지구온난화는 공기가 물을 더 많이 머금고 강우량 변동이 증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는 "따라서 과거와 같은 강도의 엘니뇨가 발생하면 더 많은 비를 쏟아붓거나 더 큰 가뭄을 일으킬 수 있다"고 말했다.
"2024년 전례없이 더운 해 될 것"
스케이프 책임관은 "2024년은 지구 기온 측면에서 전례가 없는 해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이는 호주와 인도네시아, 아마존 분지 일부 등 엘니뇨 기간 동안 가뭄과 산불이 자주 발생하는 지역이 더 큰 위험에 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호주에서만 2019년의 약한 엘니뇨로 24만㎢ 숲이 소실돼 500여명이 사망하고 수천채의 주택이 파괴됐으며 50억호주달러(35억달러) 농작물과 가축이 전멸했다. 올해 엘니뇨는 '인도양 쌍극자'(IOD)로 더욱 증폭될 전망이다. 인도양 해수면 온도를 크게 변동시키는 기상패턴으로, 호주와 인도네시아의 건조한 상태를 더 악화시킬 가능성이 높다.
이런 종류의 재난은 농산물 시장에 혼란을 야기한다. 인도정부는 작물이 자라는 동안 평소보다 더 건조한 조건을 예상해 특정 유형의 쌀 수출 금지를 선언했다. 이 금지조치는 인도 연간 수출량의 약 절반에 영향을 미치며, 총량기준으로 전세계 쌀 무역의 40%를 차지한다. 이로 인해 세계 쌀 가격은 2011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2015~2016년 엘니뇨로 동남아시아 쌀 수확량이 전세계 재고량의 7%인 1500만톤 감소한 바 있다. 잠재적인 식량 부족에 대한 공포로 올해 초부터 아시아 각국 정부는 쌀 사재기에 나섰다.
밀도 마찬가지다. 호주는 전세계 밀의 12~15%를 생산하는데 엘니뇨가 발생하면 수확량이 절반으로 줄어들 수 있다. S&P 글로벌 커머디티 인사이트의 폴 휴즈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밀 시장의 불안정한 상황을 고려할 때 호주의 밀 작황은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팜유는 또 다른 취약 품목이다. 최대 수출국인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에 가뭄이 발생하면 수확량이 감소할 수 있다. S&P는 초기 엘니뇨가 온화할 경우 말레이시아 수출이 10% 감소하고 심할 경우 그 2배까지 감소할 수 있다고 예상한다. 지난해 전세계 해바라기씨의 75%를 생산하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팜유가 해바라기유 부족 사태를 메웠다. 따라서 엘니뇨가 발생하면 글로벌 식용유 시장에 2번째 타격이 될 것이다.
강력한 엘니뇨의 또 다른 가능한 결과는 질병 증가다. 바이러스는 기온이 상승함에 따라 모기와 같은 매개체에서 더 빨리 복제된다. 모기는 더위에 더 활발하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지난 20년간 엘니뇨와 관련된 건조한 환경으로 콜롬비아와 베네수엘라에서 말라리아 발병률이 1/3 이상 늘었다. 1997~1998년 강력한 엘니뇨로 에티오피아와 케냐 우간다에서 말라리아가 크게 창궐했다. 올해는 폭우와 홍수로 페루에서 사상 최악의 뎅기열이 발생해 의료체계에 큰 부담을 주고 있다.
영양실조는 특히 영유아의 취약성을 악화시킨다. 자선단체인 세이브더칠드런은 2015~2016년 엘니뇨로 전세계 어린이 600만명이 추가로 영양실조에 걸렸으며, 이는 코로나19의 영향을 받은 어린이 수의 3배에 달한다고 추산한다. 그리고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보건서비스가 과도하게 확장되면서 질적으로 약화됐다. 보건자선단체인 빌앤멜린다게이츠재단은 팬데믹으로 예방접종률이 30년 만에 가장 큰 폭으로 감소했으며 홍역과 같은 예방가능한 질병의 발병이 급증했다고 추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