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철규 칼럼
미국경제의 고성장과 '팬덤경제 시대'의 명암
미 상무부가 10월 26일 미국의 3분기 경제성장률(GDP기준) 속보치로 4.9%(연율 환산 기준)를 발표해 놀라움을 주었다. 미국경제 규모를 생각해 보면 어마어마한 성장률이다. 2분기 2.4%의 두배가 넘는 성장률이다. 대부분의 예상을 웃돌았다.
미국 연준(Fed)으로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정책수단으로서 기준금리의 무력화마저 언급되고 있다. 기준금리를 잣대로 강력한 통화긴축을 통해 인위적으로 경기침체를 유도해서 물가를 잡는다는 연준의 정책 구상이 먹혀들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의 성장세가 지속될수록 고금리가 장기화될 가능성은 커진다.
미국경제의 고성장은 다른 주요 지역 경제와는 대조적이다. 유로지역은 0%대 성장률에 갇혀 있고, 부동산위기를 겪고 있는 중국도 과거의 성장세로 다시 돌아가기는 요원해 보인다. 한국은행 총재도 한국경제 침체를 공식화했다.
8월 16일자 파이내셜타임지(FT)는 인플레이션감축법(IRA)과 반도체법이 발효된 작년 8월 이후 이 법들과 관련돼 미국이 끌어간 제조업 투자 프로젝트 규모를 2240억달러(301조원)로 추산했다. 그것도 투자금액 1억달러 이상인 경우만 합한 규모다.
고금리는 전세계 자금을 미국으로 끌어당기는 또 다른 힘으로 미국이 세계자본의 블랙홀이 되고 있다는 분석들이 나온다. 일부 중국기업들도 미국투자를 단행하고 있다. 이 두 법안이 나오기 전에 이미 발표된 대미투자계획은 3000억달러선으로 추산되었다. 이러니 연준이 원하는 경기침체 그림이 나오기 어렵다. 양대 법안이 전세계 자본을 흡수해 갈등을 촉발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던 이유다.
변동성 커진 소비도 불안정 요인
이번 3분기 성장률이 수수께끼라고 불리는 것은 민간소비가 4.0% 증가해 지난 2분기의 0.8%보다 갑자기 커지면서 가장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월가 일각에서 대중문화계가 이끈 이벤트들에 주목하는 분석이 제시돼 관심을 끌었다.
구체적으로 보면 팝가수 테일러 스위프트와 비욘세의 콘서트, 영화 '바비'와 '오펜하이머'의 흥행 성공이 꼽힌다. 테일러 스위프트가 올 3월부터 8월까지 전국투어 공연을 하는 동안 티켓 매출액만 10억달러라는 보도도 있었다. 실제로 여행과 콘서트 등 서비스 부문의 소비지표들이 급증했으며, 공연이 있는 도시마다 팬들이 몰려들어 경기부양 효과가 뚜렷했다고 한다. 급기야 미 연준조차 보고서(베이지북)에 '스위프트노믹스'라는 말을 언급할 정도이다.
이러한 현상을 두고 '팬덤경제 시대' '팬코노미' 같은 용어들이 회자되고 있다. 과거 일부 열성팬을 중심으로 스타를 응원하거나 앨범을 사는 정도가 거의 전부였던 팬덤활동이 미국 같은 거대시장의 성장률에 영향을 줄 수 있을 정도가 됐다. 디지털화와 SNS의 발전으로 단순한 소비영역을 넘어 스스로 상품을 생산하고 순환구조를 만들어 가는 모습이다. 팬덤문화는 상품을 소비하고 상품에 가치를 부여하는 시장공간과 선물 조공 무료노동과 같은 비시장적 활동의 영역에 걸쳐져 이루어지고 있었기에 비시장적 주변부 정도로 여겨져 왔지만 이제는 그렇게 볼 수 없게 되었다.
팬덤경제의 명(明)이 경기부양이라면 암(暗)은 무엇일까. 일찍이 경제학자 케인즈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내재적 불안정은 투자의 불안정에서 온다고 지적한 바 있다. 사적 계산과 기대에 의해 결정되는 투자는 변동성이 클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지난 3분기 미국경제에서 보듯이 전통적으로 변동성이 약하고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던 소비마저 변동성이 커지면서 경제의 추가적인 불안정 요인이 될 수 있다. 적지 않은 분석가들이 이번 3분기 미국의 소비증가를 낙관적으로만 보지 못하는 이유다.
또 한편 필요한 상품보다 좋아하는 것에 대한 지출이 늘면서 시장의 세분화 분절화 파편화가 일어난다. 이는 사회의 분절화를 부추긴다. 경기침체기에 이른바 '명품소비'는 늘고 있다.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보석 귀금속 명품가방 같은 사치성 고가품에 대한 과세건수와 과세액은 꾸준히 늘었다. 2019~2022년 사이 부과세액이 두배 이상(108%) 는 것이다. 명품시장 내 양극화도 뚜렷하다. 올 3분기 구찌 매출은 감소했지만 최고급 에르메스 매출은 급증하는 식이다.
집단내 경제순환이 만들어지면서 집단 간에는 소통이 약해진다. 초연결시대에 고립은 심해진다는 모순적 현상이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울수록 고독도 심해진다. 팬덤경제는 고립사회의 한 현상일 수 있다.
경제주체 차별화로 정책 선택지 줄어
미중 갈등으로 대변되는 공급망의 세계적 재편, 팬데믹, 디지털화가 일으키는 경제적 지각변동이 순탄해 보이지 않는다. 미국의 투자 독식은 미국이 주도하는 공급망내의 갈등요인이며, 팬덤경제는 사회적 단절과 연결되어 있으며, 소비의 불안정성을 높인다. 경제정책 당국에게는 좋은 조건이 아니다. 개별 경제주체들의 차별화가 진행됨에 따라 정책 선택지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