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숙 유죄판결한 항소심, 1심과 비교해 보니

새 유죄 증거 하나 없이 추론으로 1심 번복

2013-09-17 10:03:03 게재

1심재판부 현장검증 결과도 인정안해 … 한명숙측 "재판부가 정치적 판결, 상고하겠다"

한만호 전 한신건영 대표로부터 불법 정치자금 9억여원을 받은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던 한명숙 전 국무총리(69)에게 항소심재판부가 유죄를 선고했다. 현장검증을 통해 확인한 무죄증거 등 1심재판부의 판단을 모두 뒤바꾸는 과정에서 항소심재판부는 새로운 증거 없이 '추론'만으로 유죄를 인정함에 따라 재판의 공정성 논란을 부르고 있다.

서울고법 형사6부(부장판사 정형식)는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한 전 총리에 대해 16일 징역 2년과 추징금 8억8302만2000원을 선고했다. 다만 재판부는 "원심과 항소심의 판단이 다르고 현직 국회의원인 점을 고려한다"며 한 전 총리를 법정구속하지는 않았다.

1심 재판부는 한만호 대표가 검찰에서 돈을 주었다고 진술한 동기에 의심할 만한 부분이 있고, 돈을 제공했다는 장소를 현장검증한 결과 진술이 믿을만 하지 못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1심 재판부는 "법관으로 하여금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범죄가 증명되었을 때라야만 유죄를 선고할 수 있다"는 형사소송법 정신에 따라 무죄를 선고했다.

한명숙과 한만호의 사이가 정치자금을 직접 주고받을 만큼 특별한 친분관계인지에 대한 판단부터 1,2심은 엇갈렸다. 대선경선캠프의 자금수수는 대부분 보좌관 등 자금담당자가 수령하고, 아주 각별한 사이여서 뒷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의 친분일 때만 대선주자가 직접 수수하는 게 정치권의 현실이다.

검찰은 '특별한 친분'의 증거로 한명숙 지역사무실 반값제공을 들었으나, 1심 재판부는 분양이 안돼 골치를 썩던 건물이어서 반값이라도 분양하는게 유리했던 실정을 들어 받아들이지 않았다. 총리공관에서 건설회사 관계자들과 식사를 함께 한 것은 김문숙 비서실장의 추천으로 이뤄진 점, 서로 알게된 시점도 비교적 최근이었던 점도 대선주자가 직접 정치자금을 받을 만한 친분관계는 아니라고 보았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는 김문숙이 추천했다 해도 식사초대 명단은 총리가 직접 확정했을 것이라는 추론과 함께 한씨 종친회 활동을 하던 한만호의 부친 등 간접관계를 볼 때 돈을 주고받을 만한 친분 관계였다고 판단했다.

한만호의 돈 제공 진술동기에 대해 1심재판부는 의심할 점이 많다고 보았다. 한만호가 구속중 1년이상 면회오지 않는 김문숙 등에게 서운함을 밝히면서 3억원을 달라고 협박한 정황과 회사를 빼앗아간 자들을 상대로 검찰의 힘을 이용하려 했던 사실 등을 들어 진술이 허위였을 가능성을 인정했다. 그러나 항소심재판부는 "한만호가 서운했던 이유가 돈을 주었는데도 면회를 오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다"고 추론해 유죄증거로 삼았다.

한만호의 핸드폰에 한명숙의 전화번호가 저장된 시점의 의미에 대해서도 판단이 뒤집혔다. 검찰의 공소장은 돈을 주던 시점 전후로 항상 핸드폰으로 통화해 만났다고 돼 있다. 1,2심 재판부는 검찰이 제출한 증거물인 핸드폰은 돈을 준 시점보다 3~4개월 뒤에 출시된 신제품이며, 이전 핸드폰에 내장된 전화번호를 일괄이전할 때는 한 전 총리의 전화번호가 포함되어 있지 않고, 구입 후 한달뒤에야 새로 저장됐다는 객관적 사실을 인정했다.

이에 따라 1심은 한만호가 돈을 주고받을 때 한 전 총리와 핸드폰 통화로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진술의 신빙성이 의심된다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항소심재판부는 전자기록장치의 이상으로 나중에 기록했을 수도 있고 이름만 변경했을 수도 있다고 추론해 1심판단을 배척했다.

1심은 현장검증을 통해 "도로변이 돈을 주고받기 부적절한 공개된 장소이고 썬팅한 차량안은 들여다보이지 않았다"며 "운전석에 여자가 타고 있었다는 한만호의 진술은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이에 대해서도 항소심 재판부는 "당시 한명숙의 차종이 무엇인지 기억하지 못한다는 한만호의 진술로 볼 때 (현장검증 결과를)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항소심이 유죄의 새로운 증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추론으로 1심의 판단 전체를 뒤집은데 대해 한 전총리측은 강력히 반발했다. 한명숙 전 총리 공동대책위원회는 이날 판결 직후 "무죄 선고 이후 검찰이 항소심에서 어떤 새로운 증거도 제출한 바 없는데도 정형식 재판장이 정치적 판결을 했다"고 비판했다.

공대위는 "돈전달 장소에 대해서는 검찰도 자신이 없어서 공소장 변경을 신청했으나 재판부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무리한 판결을 강행했다"고 주장했다. 한 전 총리는 "대법원에 즉각 상고해 이런 문제점들을 모두 바로잡겠다"고 말했다.
이경기 기자 ji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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