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신문 창간 22주년 기획│위기의 한국경제, 더 큰 도전을(상)

고성장시대 안 온다면서 … 개발연대 경제정책 되풀이

2015-10-08 16:38:40 게재

부동산 부양 나섰지만 내수진작 없고 가계부채 증가

재정확대에도 성장률 정체, 재정건전성 급속 악화

단기 성과에 급급해 재벌의 투자·고용에 의존 반복

"과거 개발연대 때의 고성장 시기는 우리에게 다신 오지 않을 것이다."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올 초 한 토론회에서 '불편한 진실'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우리 경제는 과거의 고성장이 가능한 단계를 넘어섰다는 것. 그런데도 국민들이 '너무 잘 나가던 시기의 추억'에 빠져있다 보니 우리 경제수준에 대한 만족도가 떨어진다면서 '고성장에 대한 환상'을 깨라고 역설했다.

하지만 정작 과거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건 최 부총리와 정부였다. 그동안 경제정책을 보면 성장률에 얽매여 단기 부양에 급급했던 이전 정부와 다를 바 없었다. 최 부총리는 취임 직후 '지도에 없는 길'을 가겠다고 했지만 그가 동원한 주요 정책수단은 개발연대부터 보아왔던 익숙한 것들이었다.

경제구조와 여건이 바뀌었는데 과거의 낡은 해법이 통할 리 없었다. 경제는 여전히 지지부진하고 위험요인만 커졌을 뿐이다.

부동산에 미련 못버리는 정부 = 부동산 정책은 대표적이다. 역대 정부가 그랬던 것처럼 박근혜정부는 출범초기부터 부동산 관련 세금을 깎아주고 정책자금을 지원하는 등 부동산 경기에 대한 집착을 보여 왔다. 특히 최 부총리 취임 이후 LTV(주택담보대출비율)와 DTI(총부채상환비율) 규제를 대폭 완화했고, 이는 '빚내서 집을 사라'는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이에 따라 주택매매거래량은 빠르게 증가해 지난해 연간 100만건을 돌파했다. 연간 주택매매거래량이 100만건을 넘어선 것은 2006년 이후 8년만이다. 올들어 거래량은 더욱 늘어 8월까지 81만6000건에 달했다.

그러나 부동산 시장의 온기는 소비확대와 내수진작으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치솟는 전세값을 견디다 못해 등 떠밀리듯 대출을 끼고 집을 산 이들이 대부분인데다 대출 부담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집값이 오를 것이란 기대감이 사라진 까닭이다. 정부는 부동산 경기가 살아나면 소비가 늘어 경기가 활성화된다는 낡은 공식에 머물렀지만 국민들은 개발연대에나 가능했던 부동산 호황기는 오지 않으리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정부의 부동산 부양책은 경기회복에는 별반 도움이 되지 못한 채 가계부채라는 우리경제의 최대 위험요인만 키우는 결과를 낳았다.

성장률에 얽매여 재정확대했지만 = 전통적인 경기부양 수단인 재정확대정책도 마찬가지다. 최 부총리 취임 이후 정부는 '46조원+α'의 거시정책 패키지를 내놓고 자금을 쏟아 부었다. 2015년 예산도 확장적으로 편성해 정부 지출규모를 20조원(5.5%)이나 늘렸다. 한은을 압박해 금리도 네 차례나 낮췄다.
하지만 경기 개선 효과는 크지 않았다. 성장률은 지난해 2분기 이후 5분기 연속 0%대에 머물러 있고, 국민들의 체감경기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재원이 부족한 개발연대에는 정부 재정투입은 경제성장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경제가 어느 정도 성숙해지면 재정효과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재정투입이 늘어나는 만큼 민간 영역의 수요가 줄어드는 등 '구축효과'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확장적 재정정책은 나랏빚만 늘려놓았다. '2015~2019년 국가재정운용계획'에 따르면 내년 관리재정수지 적자는 37조원으로 GDP(국내총생산) 대비 2.3% 수준으로 급증하고, 국가채무는 645조원을 넘어 사상 처음으로 GDP의 40%를 넘어서게 된다.

다급해진 정부는 재벌 대기업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고 있다. 이 또한 역대 정부에서 익히 봐왔던 일이다.

처음부터 의지가 약해보였던 경제민주화는 뒷전으로 밀렸고, 규제완화가 이를 대체했다. 올 들어서는 노동시장을 개혁해 청년 일자리를 늘리겠다며 재계가 요구해온 고용유연화를 몰아붙이고 있다. 박 대통령은 비리 기업인에 대한 사면권을 엄격히 제한하겠다던 공약마저 깨고 최근 재벌 총수들을 사면하고, 대형 건설사들에 대한 행정제재를 풀어줬다.

이를 통해 정부는 재벌 대기업의 투자·고용확대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약속이 제대로 지켜질 지는 불확실하다. 재벌 대기업들이 정부의 특혜를 받거나 압박에 못 이겨 투자와 고용확대를 약속해놓고 나중에 흐지부지되는 일이 과거 정권에서도 반복돼왔기 때문이다.

재벌 투자 어렵고, 해도 일시적 = 실제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김현미 의원(새정치민주연합)이 2008년부터 2014년까지 8년간 코스피와 코스닥 상장사 1835개사의 공시자료를 전수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이 기간 중 상장사 전체 당기순이익은 115%나 증가했지만 투자는 되레 0.2%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고용은 114만명에서 150만명으로 31%가 늘었지만 100대기업은 29.7%, 30대 기업은 24.1% 증가에 그쳐 대기업일수록 일자리 늘리기에 소극적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특정 재벌기업에 한정된 재원을 몰아주고 각종 특혜를 제공해 성장을 이끌도록 하는 모델은 개발연대에서 유효했을지 모르나 이제는 잘 통하지 않는 모델이 됐다. 자본과잉으로 금리가 1~2% 수준에 머무는 상황에서는 정부가 아무리 독려해도 기업투자를 늘리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정부의 눈치를 보느라 투자와 고용을 늘려도 매출과 수익이 증가하지 않으면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

박근혜정부 들어 새로운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재벌 대기업으로의 집중을 막아 중소기업과 서민·중산층에게 정당한 대가가 돌아가도록 하는 경제민주화는 분배정책이자 새로운 성장모델로 주목받았지만 경기활성화에 밀려 사실상 폐기처분됐다. '창조경제'는 재벌 대기업들의 옆구리를 찔러 창조경제혁신센터를 설치한 것 외에는 구체화된 것이 없다.

정부는 또 잠재성장력을 높이겠다며 4대 부문 구조개혁을 들고 나왔지만 노동개혁은 재벌편향적이고 금융·교육개혁은 여전히 내용이 모호하거나 그동안 해왔던 개선작업을 포장한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는 "재벌 투자에 의존한 성장, 정부가 주도하는 성장은 더 이상 효과가 없다는 게 드러나지 않았느냐"며 "그런데도 정부가 낡은 성장 정책만 되풀이 하면서 부작용만 키우고 있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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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홍 기자 bhkoo@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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