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 첫 단계는 국가 차원의 존중" … 세월호는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

2017-08-10 00:00:01 게재

유족들의 대통령 면담 요청에 청와대는 차벽으로 응답

"국가적 재난이 발생하게 되면 그것은 단순히 피해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주시하는 전국민적인 문제가 된다. 자칫 잘못 대응하면 국민적 트라우마가 될 수 있다. 이 때 나라가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의 예우다. 피해자들이 겪는 아픔과 슬픔을 예우하고 존중하면 피해자들만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국민들도 치유가 된다. 근데 세월호는 어땠나. 유가족들이 대통령에게 드릴 말이 있다고 찾아갔더니 경찰 동원해 막지 않았나.”

트라우마 전문가인 채정호 서울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의 말이다. 채 교수의 말에 비춰 보면 세월호 유가족들은 예우와 존중이라는 치유의 첫 단계를 밟지 못한 채 재난상황을 통과했다. 유가족들은 진상규명을 위한 세월호 특별법 입법 과정과 진상규명 과정에서 자신들의 의견을 조금이라도 더 반영하기 위해 처절히 투쟁하는 투사가 되어야 했다.

가장 대표적인 장면은 유가족들이 2014년 8월 22일부터 청와대 앞 청운동사무소 앞에서 농성을 시작했을 때다. 지난 1월 17일 세월호 유가족과 미수습자 가족 347명이 국가와 청해진해운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소송 2차 기일에 증언한 예은이 아빠 유경근씨는 그날을 이렇게 말했다.

“청와대에서 5월에 만나고 나올 때 대통령이 분명히 그러셨다.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너무나 진지하게 한 사람 한 사람 손 잡아가면서 이야기하셨다. 그래서 찾아간 거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하게 경찰이 청운동사무소 앞에서 틀어막았다. 비서실장이라든가 관련된 수석이라든가 행정관도 좋으니 대통령께 저희의 의견을 직접 전달할 수 있는 분이라면 누구라도 좋으니 동사무소 앞으로 나와주십시오. 거부당했다. 그 때부터 청운동사무소 앞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이 날 이후 광화문광장과 청운동사무소 앞은 경찰의 차벽으로 둘러싸여 긴장의 연속이었다. 76일간 이어진 농성 동안 스무 번이 넘게 대통령에게 면담신청을 했지만 응답은 없었다. 같은 해 11월 5일 청와대 앞 농성을 접는 기자회견에서 유가족들은 "당신의 국민들이 아프다고 서럽다고 눈물 한 번만 닦아달라고 코 앞에서 울고 있는데 (대통령이) 설마 이토록 철저히 외면하시리라곤 생각지 못했다"면서 "그래서 오늘 이 자리를 떠나 잡은 손 놓지 않고 언제나 함께 해주시겠다고 약속해주신 국민들에게 돌아간다"고 말했다.

세월호 유족들이 ‘국가가 피해자를 능멸했다’고 기억하는 또 하나의 장면은 1주기가 가까워진 2015년 4월 1일 아침 해수부가 보낸 배.보상 메시지였다. 이 문자를 받은 기억을 떠올린 건우 엄마 김미나 씨는 “1주기 다 됐을 때 배상금 받으라는 식으로 문자 하나가 날아오더라”면서 “그건 피해자를 보호는커녕 능멸을 한 거다. 우리가 왜 그렇게 모욕당했어야 했는지 지금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유경근씨도 “이제는 정부가 대놓고 모욕을 주는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위해 만들어진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의 시작과 진행, 해산 과정도 예우와 존중과는 거리가 멀었다. 특조위 진상규명소위원장을 맡았던 권영빈 변호사는 특조위 활동을 기록한 책 ‘머나먼 세월호’에서 “특조위 출범 단계부터 정부와 여당의 방해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특조위 설립준비단이 한창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을 때인 2015년 1월 16일 김재원 전 의원(당시 새누리당 원내수석부대표)은 “이 조직(세월호 특조위)을 만들려고 구상한 분은 아마 공직자가 아니라 세금도둑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대통령은 자신이 해외순방에 나가 있을 때에 국무총리가 대신 특조위 상임위원 임명장을 수여하도록 했다. 권 변호사는 “대통령은 특조위를 싫어하며 상임위원들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후에도 특조위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은 시행령 강행, 여당측 추천 특조위 위원들의 전원사퇴 기자회견 및 특조위 활동 방해, 특조위 활동기간에 대한 일방적인 법해석 등 특조위 고사작전이 2016년 9월 특조위 조기 해산 때까지 이어졌다.

채 교수는 피해자에 대한 예우와 존중의 사례로 2014년 7월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피격된 말레이시아 여객기 희생자에 대해 최대한의 예우를 갖췄던 네덜란드 이야기를 들었다. 사망자 298명 중 193명이 네덜란드인이었다.

당시 네덜란드는 희생자들의 시신이 군용기로 이송되어 오는 날 국왕 내외와 총리가 직접 나가서 시신을 맞이하는 등 국가적으로 추모를 했다.

채 교수는 “나라가 책임 져야 하는 상황도 아니고 그냥 사고라고 얘기할 수도 있는 사건이었지만 전국가적으로 추모를 하면서 희생자 유가족의 슬픔은 물론 국민들의 슬픔도 감싸안아 국민적 트라우마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낮췄다”면서 “세월호 참사에 대한 대응과 비교해 시사점이 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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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선 기자 egoh@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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