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의정사 100년을 걷다 | ④ 임시정부도 다당제 경험

유일당 운동으로 시작 '다당제·좌우연합정부'까지

2019-03-21 12:16:22 게재

독립운동 조직 일원화 시도 … 이견차로 이합집산 거듭

좌우 합의로 광복 직전 헌법인 임시헌장 제정하기도

대동론, 이당치국, 좌우통합 등 중국 국민당 영향 받아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는 한 몸처럼 움직였다. 임시의정원에서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권력구조를 바꾸기도 했다. 그러나 좌파진영 인물들이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다양한 정당이 만들어졌고 좌우 합작이 시도됐다.

1942년 임시의정원 기념사진│1942년 상해 임시정부 시절 대한민국 제34회 임시의정원 의원들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진 국회도서관 제공


◆3.1운동 진원지 신한청년당 = 1912년 7월 신규식 중심으로 상해에 처음으로 만든 독립운동단체가 동제사다. '동주공제'(한마음 한뜻으로 같은 배를 타고 피안에 도달하자)라는 뜻을 가진 동제사엔 이사장 신규식, 총재 박은식을 비롯해 신채호 문일평 김규식 조성환 이광 신건식 신석우 박찬익 민필호 김갑 변영만 정원택 여운형 선우혁 한흥교 조소앙 정인보 등이 참여했다. 동제사 핵심 참여자들은 1915년 3월 상해의 북경의 독립운동가들이 손잡고 신한혁명당을 창립했다. 이상설이 당 본부장으로 추대됐고 신규식 박은식 조성환 유동열 성낙형 등이 중심적으로 참여했다.

이후 신규식 박은식은 대동보국단을 결성하고 박은식은 대동교를 창건했으며 조소앙은 아세아민족반일대동당을 결성, 대동론을 계승했다. 여기에서 나온게 대동단결선언이다. 1917년 7월 신규식 등 14명은 '국민주권설에 따라 하나는 정부를 수립하자'고 했다. 최초의 민주공화정부를 수립하고 임시정부의 국체와 정체를 정립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신한청년당은 1918년 11월28일에 만들어졌다. 동제사의 여운형, 장덕수, 선우혁 등이 주축을 이뤘다. 국내뿐 아니라 일본, 만주 간도, 노령 연해주 등에서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독려했다. 김광수는 일본 유학생을 만나 2.8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기도 했다.

신한청년단은 3.1만세운동의 진원지가 됐다. 1919년 3월 하순 신한청년당의 서병호 여운형 선우혁 이광수 김철 등은 현순 최창식 등과 함께 상하이에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 출범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임시약헌 개정초안(1927년). 사진 국회도서관 제공

◆당에 의한 국정 운영 = 대통령제로 인한 폐단을 없애기 위해 1925년 4월 헌법을 개정해 만든 국무령제가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안창호가 유일당 결성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국무령에 취임한 홍진도 취임식에서 전 민족을 망라한 정당을 조직할 것을 주요 방침으로 제시했다. 중국국민당의 '당을 중심으로 국가를 운영한다'는 이당치국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정부 조직보다는 정당의 형태가 바람직하다는 생각에 따른 것이었다.

1926년 5월 조상섭 오영선 등의 민족주의자들이 상해에서 결성한 독립촉성회에서 유일당운동이 시작됐다.

안창호와 베이징의 좌파 세력인 원세훈은 임시정부 세력과 베이징의 좌파세력을 규합해 1926년 10월 16일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를 결성했다. 같은해 12월 김구 국무령 취임이후 민족유일당 운동을 뒷받침하기 위해 개헌을 단행했다. 1927년 3월 5일에 공포한 대한민국임시약헌에서는 제2조 단서조항을 통해 '광복운동자의 대단결인 당이 완성될 때에는 국가의 최고권력이 이 당에 있음'이라고 명시했다.

홍진과 홍남표 명의로 '전 민족적 독립당 결성의 선언문' 발표,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가 만들어졌다. 임시정부 계열에서 16명, 사회주의 계열에서 8명의 집행위원을 선정, 좌우합작으로 이뤄졌다.

1927년 11월 9일 상해에서 각지에 흩어져 있던 촉성회를 연합하기 위해 한국독립당관내 총성회연합회를 만들었고 홍진을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 세력뿐만 아니라 그동안 임시정부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베이징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도 참여했다.

하지만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진영의 목적이 달랐다. 민족주의 세력은 민족적 단일당 결성을 통해 임시정부의 위상과 역할을 강화하려고 했으나 사회주의 진영은 좌파세력의 확대와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통일전선전술로 파악했다. 민족 유일당 운동이 기대했던 결과를 거두지 못한 이유다.

한국독립당 창당│1940년 5월 한국독립당 창당 직후 중앙집행위원회를 개최한 다음 기념사진을 찍었다. 조소앙 선생은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자료 국가보훈처 제공


◆민족혁명당, 첫 좌우연합정당 = 독립운동 세력들이 이념과 노선에 따라 정당을 만들었다. 1930년 전후에 만주에 한국독립당과 조선혁명당이, 상해에 임시정부 중심의 또다른 한국독립당이 창당됐다. 난징에서는 한국혁명당이 결성됐고 의열단도 정당조직으로 재구성됐다.

1932년 10월 독립운동 정당의 연합조직인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이 결성됐고 1935년 7월 민족혁명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민족주의 세력, 사회주의 세력 모두 참가해 좌우연합이 실현된 민족유일당이 출현했다.

그러나 곧바로 조소앙 등의 세력이 탈퇴해 한국독립당을 재건했고 1937년에는 이청천의 조선혁명당 세력도 뛰쳐 나왔다.

1937년 7월 중일전쟁 발발이후 김구가 이끄는 한국국민당 중심의 우파 민족주의 세력이 통일운동에 활발히 참여했다. 같은해 8월 난징에서 김구의 한국국민당, 조소앙의 재건 한국독립당, 이청천의 조선혁명당 등 3당과 현순의 대한인국민회, 이승만의 대한인동지회 등 6개 단체가 연합해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했다.

좌파 진영에서도 12월에 조선민족혁명당으로 당명을 바꾼 민족혁명당과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연맹 조선청년전위동맹이 참여한 조선민족전선연맹으로 모였다.

중국의 권유로 독립운동세력의 통합이 시도됐다. 한국국민당의 김구와 조선민족혁명당의 김원봉이 1939년 5월 공동명의로 전 민족적 통일기구 조직을 천명했다. 그러나 8월에 조선민족해방동맹과 조선청년전위동맹에 이어 9월에 김원봉의 민족혁명당이 탈회, 협동전선운동이 깨졌다.

◆우파 3당 합당과 좌파 진영의 임시의정원·임시정부 진입 = 좌파진영는 본격적으로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 참여에 나섰다. 임시의정원은 1939년 10월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국무위원과 임시의정원 의원을 확대 개편해 기존의 한국국민당 인사 외에 재건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지도자를 영입했다. 합당을 위한 수순이었다. 1940년 5월 한국국민당, 재건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의 3당이 합당해 한국독립당을 결성했다. 우파 진영인 한국독립당 인사들로 구성된 임시의정원에 좌파 진영의 민족혁명당이 참여하는 과정에서 제18대 의장 김붕준이 탄핵제명됐다. 민족혁명당은 1941년 10월에 열리는 보선에 출마, 임시의정원 진출을 시도했다.

민족혁명당의 임시의정원 참여를 원했던 의장 김붕준은 민족혁명당의 김원봉, 한국독립당 통일동지회의 손두환과 만나 의장직권으로 각도 선거민에게 의원 보선을 통지하고 결원된 의원을 선거하도록 지시했다. 민족혁명당의 참여를 저지한 한국독립당은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의장 김붕준을 탄핵, 제명했다.

1942년 8월 우파진영의 독립군인 광복군에 좌파진영의 조선의용대와 전지공작대가 편입된 직후 임시의정원 의원 선거규정이 바뀌었다. 좌파인사들을 참여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10월에 실시한 임시의정원 의원 선거에서 조선민족혁명당 10명, 조선혁명자연맹 2명, 조선민족해방동맹 2명 등 14명의 좌파 인사가 포함된 23명의 의원이 새롭게 선출됐다. 이어 의원 23명이 보선돼 모두 46명으로 임시의정원이 확대 개편됐다. 한국독립당 소속 의원이 29명, 좌파와 무소속이 17명으로 좌우연합에 의한 임시의정원이 구성됐다. 임시의정원 구성이 다당제로 바뀌었다. 한국독립당은 여당으로서, 조선민족혁명당 등 좌파정당은 야당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됐다.

1944년 4월 임시의정원 의원은 여당인 한국독립당이 전체 50명 중 25명으로 50%를 차지했다.

4월 22일 임시정부의 헌법인 임시약헌이 좌우합의로 개정돼 광복직전의 헌법으로 임시헌장을 만들었다. 주석에는 한국독립당의 김구, 부주석에는 민족혁명당의 김규식이 선임됐다. 국무위원에는 한국독립당 9명, 조선민족혁명당 3명, 조선민족해방동맹 1명,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1명 등 14명이 선임됐다. 7개의 행정부서에도 좌파계열 인사들의 참여가 이뤄졌다. 좌우진영 인사를 망라한 통일합작 정부가 된 것이다.

[한국 의정사 100년을 걷다 연재기사]

박준규 기자 jkpark@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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