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의정사 100년을 걷다 | ⑦힘겹게 이어온 임시의정원

출석률 저조, 상임위 3개로 축소 … 의원 '18세'도 피선거권

2019-04-11 11:16:58 게재

26년간 의장 13명, 홍진 등 3번 역임 3명 … 속기록 등 기록·관리·보전 규정 꼼꼼히 챙겨

26년여간의 임시의정원은 끊길 듯한 위기를 이겨내며 명맥을 유지했다. 한때는 임시정부와 함께 위상이 크게 추락하기도 했다. 의견충돌이 나면 의원들이 그만두거나 출석하지 않는 경향이 적지 않았다. 상임위를 열기 어려울 정도였다.

◆의원선출방식도 간선제로 = 의원총수와 의원자격은 제1차 개헌을 통해 임시의정원법이 아닌 헌법 조항으로 옮겨갔다.

제7회 임시의정원은 1920년 2월23일 열렸다. 1919년 9월11일에 개정된 대한민국임시헌법에는 임시의정원의 규모를 확대해 중국령 교민과 러시아령 교민에서 3명씩 증원, 모두 57명을 선출키로 했다. 각 도와 해외동포 사회에서 직접 선출하기로 돼 있었다.

'임시의정원 의장' 홍진 선생 흉상 제막식 | 10일 국회 도서관에서 열린 임시의정원 의장과 국무령을 지낸 만오 홍진 선생의 흉상 제막식에서 이낙연 국무총리와 문희상 국회의장, 홍진 선생 손자며느리 홍창휴 여사 등이 제막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1925년 3차 헌법은 의정원 의원을 지방의회나 독립운동단체에서 선출하는 간접선거 방식으로 개정했다. 개정임시헌법 19조는 "임시의정원 의원은 법률의 정한 바에 의하여 지방의회에서 선거함. 지방의회가 성립되지 아니한 지방에는 지방의회가 성립되기까지 그 지방에 본부를 두고 있는 광복운동단체로 지방의회를 대신케 함"이라고 했다. 28조는 "광복운동자는 지방의회를 조직해 임시의정원 의원을 선거함"이라고 했다. 이는 헌법의 적용범위를 독립운동가로 한정한 때문이었다. 상해의 거류민단과 대한인민단이 지방의회의 권한을 가지고 의원을 선출했다. 단체가 없는 지역에서는 독립운동단체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 미주에서는 대한인국민회가 의원을 선출해 상해로 파견했다. 직접선거로 환원한 것은 1927년 4차 헌법에서였다.

단 "각 선거구에서 선거할 수 없을 때는 각 선거구에 원적을 두고 임시정부 소재지에 거류하는 광복운동자가 각 선거구인이 선거권을 대행할 수 있다"는 단서를 달았다. '대행선거구제'를 근거로 좌익진영 인사가 임시의정원에 참여할 때 의회 진입을 제한해 논란이 됐다.

1927년 의원의 자격연령이 만 23세로 제한됐다. 1940년 10월에 개정한 대한민국임시약헌 제 6조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만 18세에 달하고 공민권이 있는 자는 피선거권을 가진다'고 했다.


의원의 자격연령을 낮춘 이유는 당시 회의록이 남아있지 않아 알수 없다. 1944년 4월에 개정한 대한민국임시헌장에서 만 25세로 다시 상향조정했다. "조국 광복을 유일한 직업으로 간단없이 노력"한 광복운동자 경력이 3년 이상이 돼야 의원이 될 수 있었다. 임기는 3년으로 연임이 가능했다. 해방은 앞둔 시점에 의원 자격제한을 강화하고 선출의원의 지위도 보장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끊임없는 정족수 문제 = 일제의 탄압과 전쟁 등으로 임시의정원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임시의정원 의장은 20대까지 13명이 선출됐다. 3번씩 의장을 지낸 인물은 이동녕, 송병호 홍진 등 3명이다. 이동녕은 초대 의장이었고 홍진은 해방을 맞아 환국할때까지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활동했다. 홍진은 국내에 들어와서도 의정원을 계승한 비상국민회의에서 의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임시의정원은 현재 국회와 같은 체계를 갖췄다. 1919년 4월에 제정한 임시의정원법은 상임위원회, 전원위원회, 특별위원회를 뒀다.

상임위는 정족수 문제와 연결돼 부진했다. 제8회 회의를 정점으로 임시의정원 참석 의원수가 계속 줄었다. 1921년 9월에 열린 9회 회의 때는 8개 위원회를 2과(외무 재무) 6과(예산 결산) 7과(청원 징계) 등 3개 위원회로 축소했다. 14명의 의원이 출석한 제12회 의회에서는 1, 6, 7과를 합해 법제과로, 2, 3, 4, 8과를 합해 정무과로 운영하자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이 안은 결국 부결됐다.

비서국 업무 규정 중 의원 사면 청원과 신도의원 접수등록 문제는 가장 큰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새로 선출된 의원인 신도의원이 등원해 신도의원 심사위원회의 통과를 거치지 않고 의원등록을 했을 경우 의원 권리가 있는지 여부를 두고 설전이 이어졌다. 이는 '의원은 각 해당 선거구에서 선거할 때부터 자격이 있다'는 주장으로 번지기도 했다. 각 정파간 세력확장을 위한 힘겨루기였다.

한편 임시의정원은 기록의 관리 보존에 주력했다. 1919년 9월 15일 시행된 임시의정원 비서국 처무규정에서는 서무과의 주요업무로 '임시의정원 제반 기록의 정리, 관리, 보관'을 지목했다. 1920년 3월5일 의결된 임시의정원 기록에 관한 규정에 따르면 임시의정원에는 5종의 기록부를 작성 비치토록 했다. 속기록, 의사록 비밀회의록 전원위원회록 기사록 등이다.

해방후 임시정부 환국때 많은 자료가 국내로 들어왔으나 한국전쟁, 김구 주석 사망 등으로 분실된 이후 발견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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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규 기자 jkpark@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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