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의정사 100년을 걷다 | ⑧ 임시의정원 2번의 포고문

대일·대독 선전포고, 헌법 절차에 따라 임시의정원 승인

2019-04-18 11:12:11 게재

일본 진주만 기습 직후 국치 31년 만에 첫 대일선전포고

광복군, 연합군과 참전 … 1945년 독일 선전포고도 결의

임시의정원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과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를 승인해 대내외에 참전의지를 공개적으로 표명했다.

임시의정원에는 임시정부의 선전강화에 관한 동의권이 있었다. 전쟁 선전포고를 할 때는 반드시 임시의정원의 승인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워싱턴 대표단 일행 | 독일의 항복을 한 달 앞 둔 1945년 4월, 연합국은 전후의 세계 평화를 유지할 기구로서 유엔을 창설하기위해 샌프란시스코에서 창립 총회를 열었다. 워싱턴 대표단 일행도 국제연합 창립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총회 사무총장인 알저 히스에게 한국 대표단의 옵서버 자격을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독선전포고문

임시정부의 선전포고는 2차례 있었다. 1941년 12월 대일항전포고와 1944년 2월의 대독선전포고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미국의 해군기지인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면서 태평양전쟁이 일어났다. 임시정부는 12월 9일 국무회의를 열고 김구 주석과 조소앙 외무부장 명의로 된 '대한민국임시정부 대일 선전성명서'를 의결했다. 국치 31년만에 일본에 대한 공식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순 한문으로 쓰인 선전성명서는 조소앙이 기초했다. 발표일은 10일이었다. 임시정부가 연합국의 일원으로 일본 독일 이탈리아를 상대로 한 전쟁을 수행하겠다는 뜻을 국제사회에 공식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대일 선전성명서가 의정원 의결을 거쳤다는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일각에서는 의정원 의결없이 임시정부가 발표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내놓기도 하는 이유다. 1941년 12월은 임시의정원 정기회의가 폐회된 때였고 직전인 1941년 10월에 열린 제33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민족혁명당을 비롯한 좌익진영이 임시의정원 진출 과정에서 김붕준 의장 탄핵이라는 의회 초유의 사태를 겪은 상황이었다. 임시의정원에서 선전포고안 동의를 위해 임시의회를 열지 못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 역사에 정통한 한시준 단국대 교수는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헌법을 기준으로 보면 당연히 의정원 승인을 거쳤을 것으로 보인다"면서 "헌법에는 반드시 선전포고의 경우 의정원을 거치도록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일 선전포고문

◆"일본 선전포고가 일본 격패시키고 동아시아 재건의 가장 유효한 수단" = 임시정부의 헌법인 대한민국 임시약헌 제2장 10조는 '주외사절의 임면 및 조약의 체결과 선전, 강화를 동의함에는 총의원 과반수의 출석과 출석의원 3분의 2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소앙선생문집'에 실린 전문과 5개항의 '선전성명서'는 다음과 같다.

안동대 김희곤 교수의 번역을 토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일선전성명서'를 보면 전문은 "우리는 3천만 한인과 정부를 대표하여 중국 영국 미국 캐나다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및 기타 여러나라가 일본에 대해 선전을 선포한 것이 일본을 격패시키고 동아시아를 재건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 되므로 이를 축하하면서 특히 다음과 같이 성명한다."고 했다. 5개항을 보면 △한국의 전체 인민은 현재 이미 반침략 전선에 참가해 오고 있으며 이제 하나의 전투단위로서 축심국에 전쟁을 선언한다 △1910년의 합방조약과 일제의 불평등조약이 무효이며 아울러 반침략 국가가 한국에서 합리적으로 얻은 기득권익이 존중될 것임을 선포한다 △한국과 중국 및 서태평양에서 왜구를 완전히 구축하기 위해 최후의 승리를 거둘 때까지 항전한다 △일본 세력 아래 조성된 창춘과 난징 정권을 절대로 승인하지 않는다 △루스벨트 처칠 선언의 각 항이 한국독립을 실현하는 데 적용되기를 견결히 주장하며 특히 민주진영의 최후승리를 미리 축원한다 등이 들어가 있다.

◆광복군의 대외 활동 본격화 = 대일선전포고는 공문형식으로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에게 전달됐다. 영국 중국 소련 등에도 발송됐다. 임시정부가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해 전후처리에서 연합국의 지위를 인정받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당시 1940년 9월에 창설한 광복군은 대일전쟁을 수행할 정규군으로 갖추고 있었다.

대일선전 포고 이후 연합군과 실제 공동작전을 전개했다. 1943년 영국군과 인도, 미얀마 전선에서 대일작전을 수행하고 1945년에는 미국의 전략사무국(OSS, CIA 전신)과 공동으로 국내침투작전을 준비하기도 했다. 연합국은 그러나 임시정부의 대일선전포고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전쟁 막바지에 나온 대독 선전포고 =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는 임시의정원의 동의를 거쳐 정식으로 발표된 기록을 통해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홍진 의장이 국회 도서관에 기증한 37차 임시의회 회의록에 그대로 남아 있다.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는 대독선전포고문을 임시의정원에 보내 동의를 구했다. 임시정부의 요구에 의해 1945년 2월 28일 저녁 8시에 제37회 임시의정원 회의가 소집됐다. 대독선전포고 동의를 위해 열린 긴급 임시의회였다. 이날 회의에서 정부가 요구한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안이 가결됐다. 임시정부는 1945년 2월 28일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를 발표했다.

대독 선전포고는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한 급박하게 처리됐다. 1945년 4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연합국회의가 개최될 예정이었는데 이 회의에 참가할 자격은 1945년 3월1일 이전에 독일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한 국가에 한정한다는 전제가 있었다. '대독선전포고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덕일(독일) 축심국가가 안방의 독립과 자유를 파괴하며 인류의 화평질서를 교란하였다. 태평양 개전일에 본 정부는 거듭 일본에 선전을 포고하며 또 축심국의 죄악을 책하였다. 본 정부는 연합국과의 최후 승리와 원동 및 세계의 화평과 안전을 촉진키 위하여 덕국 히틀러 정부를 향하여 선전을 포고함."

[한국 의정사 100년을 걷다 연재기사]

박준규 기자 jkpark@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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