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의정사 100년을 걷다 | ⑩ 좌우의 날개로 만든 통일의회

1당체제 → 4당체제로 … 우익여당-좌익야당 연정 구성

2019-05-16 11:14:00 게재

선거구 개정 담은 개헌론 놓고 대립 격렬

의석수 비율 적용한 국무위원 자리 할당

주석은 여당, 부주석은 야당 등 협치실험

1942년 10월 25일 오전 8시에 중경 임시정부 청사에서 제34회 임시의정원 정기의회 개원식이 열렸다. 통일의원 첫 회의다.

4개 정당이 참여했다. 의원 수는 46명이었다. 여당인 한국독립당 소속 의원이 26명이었다.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연맹이 각각 16명, 2명, 2명의 의석을 확보했다. 최동오 부의장 등 37명이 의장선거를 실시했다. 총투표수 37표 중 홍진 의원이 33표를 얻어 의장에 당선됐다. 여당 소속 홍 의장은 민족진영뿐만 아니라 좌익진영에서도 수용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통일의회 회의시간이 정례화됐다. 홍 의장은 매일 의회 개회시간을 오전 9시~12시, 오후 2~5시로 선포했다.

통일의회 기념 사진 | 제34회 임시의정원 회의는 진보와 보수진영이 같이 모인 통일의회 이후 첫 회의였다. 이 회의에서 좌우연합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기틀이 마련됐다.


◆대정부질의로 여야 승부 겨뤄 = 10월 31일 오전 9시에 개회한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대정부질의부터 시작했다. 민족혁명당 왕통 의원이 한미협회장 크롬웰과 미 국부장관 헐이 주고받은 편지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크롬웰이 두 차례에 걸쳐 헐에 '대한민국 정부 승인'을 필요성을 주장한 편지를 전달했지만 헐은 원론적인 답변으로 사실상 임정승인 요구를 거절한 사실을 문제 삼은 것이다. 여당이 미국과의 외교문제를 맡긴 이승만과 민족혁명당 김원봉과 연결돼 있는 한길수의 활동에 대한 여야의 평가로 변질돼 논란이 확산됐다. 별다른 결론을 얻지 못한 채 끝났다.

◆여야 합의로 이뤄진 '광복군 행동 준승 취소건' = 여야가 한 목소리로 성사시킨 것은 '한국광복군 행동 9개 준승' 취소 건이었다. 10월 28일 조선민족혁명당 이연호 의원 등 17명이 이 안건을 제의했다.

'9개 준승'은 1941년 11월 중국군사위원회가 광복군의 활동을 통제하겠다는 9개 조항을 말한다. 이 안건은 11월3일 상정됐다. 광복군 총사령인 이청천은 "남의 땅에서 군 활동을 하자니 부득이 9항을 접수하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이번 의회에서 결정되면 고칠 수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임시의정원에서 '9개 준승' 취소를 강력히 요청해 주면 수정하는 데 유리한 토대가 될 것으로 봤다.

여야의 세부 논의에 열이 붙자 홍 의장이 토의에 들어왔다. '의장이 토론에 참여코자 할 때는 의장석에서 나와 부의장으로 대리케 하고 해당 안건이 결정되기 전에 다시 의장석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임시의정원법 66조에 따른 것이다. 결국 김상덕 손두환 안후 유자명 공진원 등 5명으로 구성된 특별위원회를 만들었다. 11월 9일 수정안이 채택됐다. '행동준승 9개조항 폐기'를 요구하면서 "중국 영토내에서 침략국가에 대해 공동작전을 계속하는 기간 내에 있어서는 광복군의 지휘를 임시로 중국구 사령장관에게 위임한다"고 했다. 임시의정원의 결의를 근거로 임시정부는 중국측에 '9개 준승' 취소를 요구해 1944년 8월 관철시켰다.


◆제1야당의 힘 = 제 1 야당인 조선민족혁명당은 기관지인 '우리통신'에 3가지 목표와 전략을 내놓기도 했다. 건국강령을 부분 개정, 임시의정원에서 통과시키고 임시약헌을 바꾸며 야당인사들도 정부 행정부서에 참여시킨다는 것이다.

먼저 1941년 11월 임시정부가 제정공포한 건국강령의 합법 비합법 문제를 둘러싸고 격렬하고 지루한 싸움이 이어졌다. 임시의정원 통과없이 정부가 건국강령을 발표했다고 주장하면서 각 당파의 의견을 종합해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1940년 10월에 제정, 공포한 '대한민국임시약헌'을 개정하자는 주장도 나왔다. 진보진영이 임시정부에 참여하면서 이전에 만든 헌법을 바꾸자는 얘기다. 김원봉 조선민족혁명당 의원은 임시의정원 의원의 대행선거와 종신제 임기와 같은 불합리한 요소를 바꿔야 한다고 요구했다. 문제제기된 핵심조항은 대한민국임시약헌 2장 4조로 '임시의정원은 대한민국 인민이 직접 선거한 의원으로써 조직함. 단, 국내 선거구에서 선거할 수 없을 때는 임시정부 소재지에 교거하고 각 선거구에 원적을 둔 광복운동자가 각 선거인의 선거권을 대행한다'고 명시한 부분이다. 임시정부 소재지인 중경에 기반을 두고 있는 여당인 한국독립당은 '대행제'라는 기존의 선거제도를 고집했으며 야당은 개정을 원했다. 정치적 기반을 확보하려는 기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제35회 임시의정원은 1943년 10월 9일에 열렸으며 1944년 4월 15일까지 6개월동안 56차례나 회의를 열어 선거구제 개정을 포함한 헌법 개정을 놓고 치열한 논의를 이어갔다. 임시의정원 역사상 가장 논쟁이 치열했다. 임시약헌 개정문제는 임시약헌수개위원회에 맡겨졌다. 1942년 11월 27일~1943년 6월18일까지 22번의 회의를 열어 초안을 마련했다.

임기가 끝나는 11명의 국무위원을 바꾸는 것도 중요한 안건이었다. 당시 한국독립당이 9명을 차지, 국무위원회를 장악하고 있었다. 야당측이 일정비율을 야당에 배분할 것을 요구했다. 한국독립당이 거부하면서 회의는 공전을 거듭했다. 국무위원 선출방식도 여당측의 유기명과 야당측의 무기명이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여야의 대립과 갈등이 커지자 홍진 의장과 최동오 부의장이 한국독립당을 탈당해 무소속으로 중재에 들어갔다. 여야가 결국 타협점을 찾았다. 주석과 부주석을 각각 1인씩 두고 주석이 각부 부장을 임명토록 했다. 국무위원은 한국독립당 8석, 조선민족혁명당 4석, 나머지 두 당이 1석씩 배정됐다. 주석은 한국독립당이, 부주석은 조선민족혁명당에서 맡기로 했다.

좌우연합정부의 기초가 마련된 것이다. 4월 24일 투표를 통해 주석에 김구, 부주석에 김규식이 선출됐다. 4월 26일에 좌우 연합정부가 출범했다. 중국 관내 독립운동 세력이 임시정부로 결집했다.

임시의정원은 좌우연합정부를 '전 민족 통일전선정부'로 규정했다. 좌익과 우익 독립운동 세력이 임시정부로 결집해 통일을 이뤘다는 의미다.

[한국 의정사 100년을 걷다 연재기사]

박준규 기자 jkpark@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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