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의정사 100년을 걷다 | ⑪ 해방 준비한 임시의정원

건국강령·독립운동자대표대회·임정확대 등 '해방 이후' 논의

2019-05-23 11:30:39 게재

정부 주도의 '건국강령', 의회 인준 추진하다 실패

본질 외면한 정쟁에 '제 3지대' 신한민주당 창당

좌익 참여비율 높이려다 우익 반대로 가로막히기도

태평양 전쟁에 일어나자마자 임시의정원은 '해방 이후'를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대일, 대독 선전포고는 온전한 '독립'을 위한 정지작업이었다. 임시정부는 1941년 12월 10일 대일선전성명서를 발표했다. 12월 8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 직후인 12월 9일 국무회의에서 의결하고 다음날 발표한 것이다. 전후처리에서 연합국의 지위를 확보하려는 생각에서 나온 전략이었다. 기록에 남아있지는 않지만 국무회의 의결 직후에 임시의정원의 승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45년 2월 28일 저녁 8시에 열린 37회 임시의정원에서는 28명의 의원이 모여 대덕선전요구안을 가결시켰다. 3월 1일 이전에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한 국가에 한정해 4월에 열리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연합국회의에 참석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임시의정원에 긴급하게 요청한 사안이었다.

고국 귀한 직전에 찍은 임정 요인, 임시의정원 의원 사진 | 1945년 광복 직후 고국으로 귀환하기에 앞서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인 충칭시 칠성간연화지 청사에 모인 임정 요인들과 임시의정원 의원들이 저마다 손에 태극기를 들고 사진을 찍었다. 자료제공 독립기념관


◆건국강령 '토지 국유화' 논쟁 = 임시의정원은 정부가 발표한 '대한민국 건국강령'의 실효성을 놓고 논쟁을 벌였다. 1941년 11월 28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회는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발표했다. 임시의정원에서는 야당격인 좌익진영의 조선민족혁명당을 중심으로 '건국강령'의 임시의정원 통과 필요성을 제기했다. 총론, 복국, 건국 등 3장 24개항으로 구성된 건국강령 중 '건국'에 해당되는 부분에 이견이 많았다.

1942년 10월 30일 제34회 임시의정원 7일차 회의에서 신영삼 의원은 임시의정원 국무위원회가 제정, 공포한 건국강령이 임시의정원을 통과했는지 물었다. 추궁 대상은 건국강령을 기초한 조소앙 외무부장이었다. 조 부장은 임시약헌(헌법) 26조 '광복운동방략과 건국 방안을 국무위원회 직권으로 의결함'이라는 내용을 제시하며 "건국강령의 제정과 공포를 정부 단독으로 할 수 있고 임시의정원은 동의, 추인할 수 있다"고 답했다. "일반적 공포이지 완전한 법률은 아니다"고도 했다.

손두환 의원은 "전 민족의 공동강령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여러 당파의 의견을 종합해 개정한 후 임시의정원을 통과하는 법적 수속을 밟아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광제 등 야당 의원들은 임시의정원에서 만들거나 통과되지 않은 강령을 지킬 의무가 없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토지국유화에 우익은 '찬성' 좌익은 '반대' = 제1야당인 좌익성향의 조선민족혁명당은 특히 정치, 교육, 경제 균등 등 삼균주의에 기초한 사유재산 보호와 토지국유화에 제동을 걸었다.

같은 해 11월부터 7개월간 열린 임시약헌 수개위원회에서도 건국강령의 토지국유화 규정에 대한 논란이 이어졌다. 12월 26일 회의에서 조선민족혁명당의 신영삼 의원은 "토지국유에 반대한다"고 했다. 우익의 한국독립당 조완구 의원은 "건국강령의 토지국유규정은 사유제 부인에서 나온 게 아니라 우리 고유제도에 의해서 나온 것"이라고 했고 조소앙 의원(정부의 부장이 아닌 의정원 의원자격)은 "자본주의 사회를 건설한다면, 따라올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했다. 우익이 토지국유화를 주장하고 좌익이 토지국유화 반대로 맞서는 다소 엇갈린 상황이었다. 이는 해방 후 좌우 기반을 모두 확보하기 위한 각 당의 전략적 선택이었다.

1943년 10월 9일 제35회 임시의정원 역시 건국강령 문제가 가장 큰 화두였다. 10월 14일 유림 안훈 박건웅 유진동 강홍주 김재호 등 6명의 의원이 홍진 의장에서 '건국강령 수개(개정)에 관한 안'을 내놓았다. 상임위에서 심사하던 중 내용이 너무 광범위해 12월 10일 조소앙 유림 손두환 강홍주 최동오 등 수개위원 5명을 선출해 차기 의회에 초안을 제출하도록 했다.

1944년 4월 20일 열린 제36회 임시의정원의 '건국강령수개위원회'에서는 조소앙 의원의 '부분적 수정'과 다른 의원들의 '전면 개정'이 부딪혔다. 1945년 제38회 임시의정원 수개위원회에 강홍주 의원이 초안을 보고했다.

광복 직전까지 임시의정원은 건국강령을 수정, 입법화하려 했으나 각 정파의 이해차이로 실패했다.

◆좌우 연합 '제 3지대 실험' = 유럽 등지에서의 연합군 승전보가 전해지면서 임시의정원의 움직임도 빨라졌다. 제 38회 임시의정원 회의는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 수립 26주년이 되는 날인 1945년 4월 11일에 열렸다. 해방전 마지막 정기회의였다. 5월 8일까지 한달 가까운 시간동안 16번의 회의가 진행됐다.

가장 큰 쟁점은 새로 만들어진 신한민주당이 주도했다. 신한민주당은 1945년 2월 8일 우익이면서 여당인 한국독립당과 좌익의 조선민족혁명당에 불만을 품고 탈당한 인사들이 중심이 돼 결정한 조직이다. 양당이 임시정부 운영의 주도권을 놓고 정쟁을 이어가자 대립과 갈등을 청산하고 좌우 합작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자는 목표를 내걸고 나온 결사체다. 한국독립당에서는 임시의정원 의장 홍진뿐만 아니라 부의장 최동오, 참모총장 유동열과 안원생, 유진동 등 소장파가 나왔고 민족혁명당에서는 김붕준 손두환 신기언 신영삼 강창제 등 비의열단 계열이 이탈했다. 신한민주당 창당은 한국독립당을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정당으로 만들었고 조선민족혁명당을 의열단 직계조직으로 축소시켰다.

임시의정원은 여당인 한국독립당이 전체 의원 49명 중 23명으로 가장 많았지만 과반을 확보하지 못했다. 신한민주당이 12명으로 제 1야당이 됐다. 조선민족혁명당은 9명, 해방동맹 3명, 무정부주의자연맹 2명이었다. '양당 주도체제'가 '3당 주도체제'로 전환된 셈이다.

◆우익의 기득권 고수로 실패 = 신한민주당은 '독립운동자대표대회 개최안'을 내놓았다. 해방후 민족 국가 건설 문제를 국민대표회의에서 결정하고 독립운동 기간 중에 나온 문제도 국내외 독립운동 대표들로 독립운동자대회를 조직해 해결하자는 취지였다. 소집주체를 의장, 주석, 총사령으로 하자는 핵심 제안에 여당인 한국독립당이 동의하지 않았다. 임시정부의 위상이 훼손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결국 "5당 통일회의에서 검토하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4월 21일 제안자에게 반려했다.

그러고는 좌우 양당인 한국독립당과 조선민족혁명당 의원 7명은 5월 7일 긴급제의안으로 '독립운동자대표대회 소진에 관한 건'을 제출했다. 소집 주체를 임시정부 국무위원회로 바꾸고 대회 구성요소, 범위, 소집 질서 등 대회 권한을 임시정부가 행사하기로 했다. 이날 강홍주 의원이 "원외에서 협상하기로 해놓고 의안으로 제출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따졌다.

수적 열세를 뚫지는 못했다. 당일 표결에 부쳐졌다. 28명 중 22명 찬성으로 가결됐다. 그러나 해방전까지 독립운동자대표대회는 소집되지 않았다. 일제 패망을 앞두고 독립운동 세력규합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의정원 의원정수를 늘리자고? = '독립운동자대표 대회 개최안'을 돌려받은 신한민주당은 5월 1일 '임시의정원 급 정부확대개정안'을 제출했다. 제안자인 손두환 의원은 소련 지역에 임시정부가 생길 가능성이 높은데 해방이후 소련과 미국-중국의 지원하는 임시정부가 달라 우리나라가 분열되고 위임통치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제안취지를 설명했다. 임시헌장과 임시의정원 개편을 통해 의원정수를 늘리고 국무위원 구성을 개편하려는 시도였다.

임시의정원 확대는 중경 거주 한인으로 제한된 의원선발요건을 화북, 만주, 소련, 미주 등으로 거주지역을 넓히는 게 핵심이었고 이는 좌익진영의 계속된 요구였다. 임시정부 국무위원회에서의 한국독립당 장악력을 축소할 수 있는 방안이기도 했다. 임시의정원 확대개편은 독립운동자대표대회와 맞닿아 있는 사안이었다.

한국독립당은 소련지역 대표들의 임시의정원 합류에 반대했다.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기득권을 내려놔야 한다는 점도 여당엔 부담이었다. 심사위원들이 "안으로써 성립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내자 제안자인 박건웅 의원이 "심사위원회가 개최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결국 심사위원회 표결에서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 확대개조안은 찬성 16명, 반대 3명으로 폐기됐다.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이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에 참여할 수 있는 길도 실패로 돌아갔다.

[한국 의정사 100년을 걷다 연재기사]

박준규 기자 jkpark@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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