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의정사 100년을 걷다 | ⑫ 해방전후 좌우 분열 극심

임시의정원·임시정, 비상국민회의·최고정무위로 이어져

2019-05-30 12:51:36 게재

해방후 임시회, 야당 퇴장해 환국방안 의결 못해

이승만·미국 반대로 과도정부 수립 결국 실패

좌우합작 과도정부 성사 안돼, 우익중심 진행

해방직후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는 미국뿐만 아니라 소련으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했다. 환국마저 개인자격으로 들어간다는 서명을 한 이후에야 수송기를 제공받을 수 있었다. 미국은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의 과도정부 수립을 사사건건 방해했다. 이미 김구가 아닌 이승만 주도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구상한 후였다.

◆중경의 마지막 회의 8월 17일 = 임시의정원에 광복소식이 전해진 것은 8월 10일이었다. 김구 주석은 미국 전략첩보기구인 OSS와 국내 진입작전을 협의하기 위해 서안에 있었다. 광복군 대원을 국내로 진입시켜 적후공작을 전개한다는 국내진입작전에 합의한 후 8월 10일 저녁식사중 일제의 항복 소식을 들었다.

임시정부는 일제 항복 직후 국무회의를 열어 5개항을 의결했다.

임시정부 요인 경교장 기념촬영 | 1945년 12월 6일 임시정부 요인 제1진과 제2진이 환국한 후 경교장에서 귀국기념 합동촬영을 하고 있다.


1945년 8월 17일 제39회 임시의정원 임시의회가 열렸다. 중경에서의 마지막 회의였다. 홍진 의장은 "당면문제를 잘 해결하는 데는 이 회의를 잘 해 보아야겠다입니다. …… 그러므로 여러분이 화평공제하는 새 정신에서 새 출발하기 바랍니다"고 했다. 여야가 헌법개정, 건국강령수개, 국무위원 선임, 임시정부 확대 개조 등에서 첨예하게 대립과 갈등을 빚어온 데 따른 의장의 당부였다.

8월 18일 임시의정원 회의가 이어졌다. 김구 주석이 돌아왔고 정부는 국무회의에서 의결한 5개항을 제출했다. 회의는 순조롭지 못했다. 임시정부는 현 상태 그대로 환국한다는 방침을 제출했지만 야당 의원들이 '임시정부 개조'와 '국무위원 총사직'을 요구했다. 강홍주 김철남 손두환 박건웅 등 민족혁명당과 신한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야당측 의원들이 정부의견에 반대입장을 제시했다.

3일간 휴회했다. 같은달 21일 회의에서 김구는 "현직 국무위원은 총사직할 필요가 없다"면서 "입국을 위한 준비가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야당 요구를 수용할 수 없음을 명확히 했다. 홍진 의장의 중재도 소용이 없었다.

다음날인 22일 오후 부의장 최동오가 사회를 맡아 표결에 부치려고 했다. 이정호 민족혁명당 의원이 "현 국무위원이 총사직하기 전에는 여하한 제의안일지라도 결의할 수 없으니 총 퇴석한다"며 민족혁명당 의원 4명과 같이 나가버렸다. 신한민주당 강호주 의원도 같은 당 6명의 의원과 함께 퇴장했고 해방동맹 소속 3명의 의원도 따라 나섰다. 야당 의원 13명이 회의장을 떠나면서 법정 의원수 부족으로 더 이상 회의를 진행할 수 없었다.

◆국무회의 결의로 환국방침 결정 = 임시의정원이 합의에 실패하자 국무회의는 자체 결의로 환국방침을 세웠다. 그러고는 일본이 항복문서에 조인한 다음날인 9월 3일에 향후 임시정부의 당면 정책을 내놨다. 김구의 '국내외 동포에게 고함'에 포함된 14개조 당면정책의 핵심은 임시정부가 국내로 들어가 과도정권을 수립할 때까지 정부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이었다.

임시정부 환국은 순탄하지 않았다.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았던 미국정부는 9월 21일 미국의 주중대사에 "개인자격의 귀국이라면 반대하지 않는다"는 지침을 전달했다. 임시정부가 '정부'로 국내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김구 주석 등 임시정부 요인들이 중경에서 상해로 돌아온 것은 11월 5일이었다. 장제스 정부가 내준 비행기를 탔다.

◆완전히 갈라진 임시정부 = 11월19일 미군정 요구대로 김구는 중국전구 미군사령관인 웨드마이어에게 개인자격의 귀국이라는 서약서를 제출했다. 11월 20일 미국에서 보내온 비행기는 C-47중형 수송기 1대뿐이었고 정원은 15명이었다. 중경에서 상해에 도착한 국무위원만 29명이었다. 11월23일에 1진으로 김구 주석과 김규식 부주석 등 15명이 김포공항으로 환국했다. 홍진 임시의정원 의장, 조소앙 외무부장 등 2진은 12월 1일 목포공항을 통해 국내로 들어왔다. 이승만은 10월 16일, 미국 태평양 방면 육군총사령관 맥아더가 주선한 비행기를 타고 도쿄를 거쳐 서울에 도착했다. 12월말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을 5년간 신탁통치키로 결정했다. 김구 주석은 내무부장 신익희에게 국자 제1호와 제2호 임시정부 포고문을 발령케했다.

◆미국에 저항하며 과도정부 수립하려는 비상국민회의 = 임시정부의 계획은 과도정부를 수립한 후 임시정부를 인계하는 것이었다. 1946년 1월 4일 김구 주석은 "남의 손을 기대할 것 없이 우리 손으로 신속히 강고한 과도정권을 수립하자"고 했다. 각계각층의 혁명당파와 종교단체 등으로 비상정치회의를 소집할 것을 주장했다.

먼저 임시의정원과 같은 국민들의 의견을 모을 모임이 필요했다. 임시정부도 임시의정원을 통해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2월 1일 명동 천주교회당에서 비상국민회의를 결성했다. 비상국민회의 의장과 부의장은 임시의정원의 의장과 부의장인 홍진, 최동오가 맡기로 했다. 비상국민회의가 임시의정원을 계승한 것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임시정부 국무회의 기능은 최고정무위원회에서 맡기로 하고 2월 13일 명단이 발표됐다.

정무위원회 인원수와 위원 선정은 이승만, 김구에게 일임하는 내용의 안건이 가결됐고 이극로 등 22명의 서명을 받아 공산당, 독립동맹 등 좌익 단체들의 참가를 권유하는 안건이 통과되기도 했다.

창립대회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당면정책 제6항에 의한 과도정권 수립에 관한 일체 권한을 유하고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직능을 계승한다'고 규정했다. '임시의정원-임시정부'를 '비상국민의회-최고정무위원회'로 전환, 과도정부를 구성하려는 의도였다.

김구와 완전히 틀어진 미국이 적극 저지하고 나섰다. 2월 14일에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회를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으로 개편했다. 비상국민회의를 미군정의 자문기구로 전락시키려는 계획이었다. 임시정부가 거부했다. 홍진 의장은 "비상국민회의와 민주의원은 서로 다른 것"이라고 선언했다. 임시정부는 비상국민회의는 의회 가능, 민주의원은 정부 기능을 갖는 것으로 봤다.

1946년 5월부터 김규식 여운형 등을 대표로 좌우합작운동이 펼쳐졌다. 김규식 김붕준 최동호 안재홍 등을 비상국민회의에 참여시켜 좌우합작으로 갈라진 세력을 통합하자는 취지였다. 그러나 실패했다. 찬탁의 좌익세력이 빠지자 반탁의 우익세력 주도로 임시정부가 운영됐다.

1947년 2월엔 비상국민회의를 중심으로 민족세력의 결집을 추진해 독립촉성국민회, 민족통일본부가 통합, 국민의회를 결성했다. 과도정부를 수립하기도 했지만 주석으로 추대된 이승만이 참여하지 않았다. 1947년 9월에 국민의회가 대한국민회로 개편했다. 주석 이승만, 부주석 김구 등 국무위원을 선출하고 정무위원회를 구성했다.

이승만은 또 참여하지 않았다. "남한만이라도 총선거를 실시해 국제적으로 발언권을 취득하자는 생각이니 일반 동포들은 양해하여 달라"고 했다. 임시의정원을 계승한 비상국민회의의 과도정권 수립은 무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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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규 기자 jkpark@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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