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유책주의와 파탄주의

2019-06-17 11:51:31 게재

유책주의 이혼법제는 '상대가 잘못하면 이혼청구를 할 수 있다'라기 보다는, '내가 잘못하지 않으면 이혼당하지 않도록 국가가 내 혼인관계를 보호해 준다'가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이것이 언뜻 보면 상식적이고도 정의로운 것 같다.

하지만 유책주의 이혼법제의 가장 큰 문제는 이혼을 전쟁으로, 지옥으로 만들어 이혼과정을 고통스럽게 하고 그 와중에 미성년자녀들이 피해나 상처를 입기 쉽다는 것이다.

즉, 이혼을 하려면 상대가 잘못했다고 주장하고 나아가 증명을 해야 한다. 그런데 부부관계가 그렇게 간단한가. 어느 일방만 잘했다 잘못했다 하기 쉽겠는가. 뿐만 아니라 사람관계가 잘잘못으로 전부 설명될 수 있을까. 여러 복합적이고 알기 힘든 이유로 누구의 잘못이랄 것 없이 잘 안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혼하려면 상대가 나쁘다고, 잘못했다고 주장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내용의 소장을 받아 보게 되는 상대 배우자는 극심한 분노나 배신감이 들 수밖에 없고 더 지독한 비난을 써서 답변서를 제출하는 일이 허다하다.

그렇게 유책주의 이혼재판은, '니가 더 잘못했다'는 공방으로 둘 다 상처투성이가 되게 된다. 고통은 말할 수 없고 자존감은 바닥으로 떨어진다. 한때 가장 사랑했던 사람으로부터 세상 다시없을 인간쓰레기 취급의 비난을 반드시 들어야 하니까.

그 무엇이라도 '꺼리'가 될 만한 것은 전부 들먹여서 상대 잘못으로 만들어야 하니 추억이 남아날리 없다. 둘 만의 사생활이나 성관계까지도 다 들추어지는 게 다반사다. 그런 공방 속에서 사실 둘 다 인간으로서의 자기존중감은 처참히 뭉개져 버린다.

미성년자녀가 있을 경우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이혼은 부부관계를 종결짓는 것일 뿐 부모관계는 이혼 후에도 변함없어야 한다. 이혼 후 아이들의 양육책임을 어떻게 나누고 어떻게 협력할지 평온하게 협의하고 실제로 수행해 보며 잘 적응해 나가야, 아이들을 보호하며 잘 이혼할 수 있게 될 터이다. 그런데 과연 엄마, 아빠가 저런 전쟁을 치른다면 아이들 양육책임 협의나 이혼 후 양육협력을 제대로 할 수 있겠는가.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자칫 아이들마저 전쟁의 무기로 동원되기 십상이다. 애들한테 아빠가 술 먹고 엄마 팼다, 혹은 엄마가 바람 폈다 하는 등의 진술서를 쓰게 한다든가(이 자체가 정서적 아동학대다), 아이들로서는 평생에 트라우마로 남을 고통스런 경험을 할 위험이 절차에 내재되어 있다.

유책주의 이혼재판 과정을 통과하는 동안 부부는 전쟁으로 만신창이가 되고, 부모로서의 남녀는 자녀들이 상처입고 고통받을 위험으로부터 제대로 아이들을 보호하기가 어렵다.

유책주의는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그 상식적 타당성에도 불구하고 '필요에 의해서', 즉 '삶은 계속되어야 하고, 이혼 후에도 여자나 남자나 아이들이나 모두 잘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필요에 의해서' 파탄주의 쪽으로 전향 입법되었으면 한다.

어차피 일그러져 회복될 수 없는 관계라면, 굳이 과거의 이유나 잘잘못을 따지기 보다는, 남녀가 평온히 잘 헤어지면서 아이들을 위한 이혼 후 협력적 양육관계를 잘 정립할 수 있도록 잘 준비할 수 있는 그런 이혼 법제가 '필요'하다.

파탄주의는 옳기 때문에가 아니라 '필요'하기 때문에 도입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판사가 초입법적 판결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국회의원들이 민법을 개정해서 파탄주의를 수용하여 평온한 이혼과 이혼 후 협력적 양육관계를 보장할 수 있는 이혼법제를 만들어 갈 필요가 있지 않을까.

임수희 대전지방법원 천안지원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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