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의정사 100년을 걷다 | (16) 전쟁의 상흔, 국회 안까지 덮다

피난 안 간 국회의원에 "인민군 도왔다"며 '자체 사상검증'

2019-07-25 11:03:39 게재

"이적행위 감행한 자에 대해 신속히 흑백을 결정한다"며 특위 만들어

이승만 대통령 측근 비리 국회 재수사 … 비리자금 정치권 유입 손 못대

전쟁은 국민을 갈라놓았다. 국회 안에서도 어느 편이냐고 따졌다.

'국회의원 자가 숙청'은 말 그대로 국회의원들이 스스로 숙청한다는 의미다. 한국전쟁 직후 국회는 정부와 함께 피난을 떠났지만 부득이하게 서울에 남은 국회의원의 사상검증을 하겠다는 시도였다. 특별위원회를 만들었다. 1950년 11월 1일에 '국회의원 자가 숙청에 관한 특별위원회 설치에 관한 건'이 논의됐다. 9월 서울수복으로 다시 돌아온 직후의 일이다.

6월27일에 찍은 경남도청내 무덕전에 위치한 의사당. 자료 국회 도서관


당시 본회의 회의록을 보면 신익희 의장은 "북한 괴뢰집단의 불법침략으로 인한 수도포기 이래 서울에 잔류한 국회의원 중 이적행위를 감행한 자에 대해 국회는 특별위원회를 설치하여 신속히 흑백을 결정함으로써 국회의 건전성을 확립할 것. 이것을 제출했는데 10월 11일 제36차 회의에서 보류하기로 결정됐다"며 "휴회 중 국회의원 각자가 자수할 기한을 주어 스스로가 태도를 결정하도록 하되 그 후에 특별위원회를 조직할 필요가 있다면 조직하기로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첨예한 두 의원의 말을 들어보자. 신광균 의원은 "남하하지 못한 잔류 의원에 대해 심사를 하자는 것은 부당한 일"이라며 "남하한 것만이 나라를 위하는 공로라고 나는 볼수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불행히 인민공화국에 협조한 사람이 있을 것이고 다행히 굴에 있으면서도 인민공화국을 반대하면서 한 사람이라도 옳은 길로 인도한 그런 의원도 있는 것"이라고도 했다.

1951년 5월 14일 피난중 거창양민학살사건 조사 등이 이뤄진 국회 본회의 장면. 자료 국회 도서관


김형덕 의원은 "제가 서울에 올라와서 이 문제에 대해 항간의 여론을 들어봤는데 이 문제가 제일 중대한 문제로 되어 있었다"며 "잔류국회의원 중 (북한괴뢰군에) 자수자들은 성명서를 발표할 때에 우리는 북한 인민공화국을 지지한다, 남한 이승만 괴뢰들이라느니 혹은 대한민국을 괴뢰집단이라느니 이렇게 명칭하여 가면서 타도하지 않으면 안된다느니 발표했다"고 말했다. 그는 "압력에 눌려 가지고 자수를 했다고 볼수도 있는 문제면 왜 (서울)탈환해 환도해가지고 국회에 출석할 때에 자기가 본의가 아닌 성명서를 발표했다고, 본의가 아닌 자수를 했다는 것을 성명하지 못했느냐"며 "서울시민은 그 사람은 사상적으로 보아서 인민공화국을 지지하고 그 사람의 사상을 갖다가 가히 판정할 수 있다는 것을 갖다가 지금 시민이 규정하고 있다. 우리 자신도 그렇게 안 볼 수 없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상검증은 논란만 부추겼을 뿐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거창사건특위, 진실을 밝히다 = 인민군이 거쳐간 뒤 국회의원의 사상검증은 논란으로 끝났지만 양민은 재판없이 학살됐다.

2월 11일 국군 11사단 9연대가 경남 거창군 신원면 주민을 공비내통혐의로 살해한 거창사건을 파헤치기 위해 국회가 나섰다. 거창사건특별조사위원회의 목적은 "거창에서 187명이 공비토벌 과정에서 처형된 사건에 대해 조사단을 파견하여 조사·보고케 한다"고 했다. 3월30일에 8명의 위원이 선임됐다.

1951년 12월23일에 원내자유당 창당식에서 축사를 하는 신익희 국회의장 모습. 자료 국회도서관


4월 18일에 거창사건에 대한 보고가 비공개로 이뤄졌고 5월14일엔 거창사건 조사처리에 관한 결의안이 본회의에서 가결됐다. 민국당 노기용 의원, 공화당 김종순 의원, 신정 지연해 의원, 민주 서이환 의원 등 교섭단체에서 한명씩 결의안 작성에 참여했다. 주문에서는 "거창 사건에 대한 정부와 국회의 조사가 그 전말이 대동소이하나 차이점을 검토한즉 비합법적 행형이라고 단언하지 않을 수 없고 행형의 방법이 심히 부당하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을 것"이라고 평가하면서 "헌정의 궤도인 민주정치의 달성, 보장을 기하기 위하여는 지휘 감독의 직원이 있는 사단장 이하의 각 책임자와 현지의 행정책임자를 준엄하게 처벌, 또는 징계함으로써 행정의 과오를 시정 천명해야 한다는 것을 만천하에 공언하는 바"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전시 중 진실규명엔 한계가 있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관으로 참여한 3명이 출간한 '국가폭력'에 따르면 육군 제11사단 제9연대 제3대대장 한동석 소령의 토벌대는 1951년 2월6일 오전 11시에 경남 산청군 금서면 수철리에서 첫 작전을 전개했고 2월7일 오전 6시에 금서면 가현에서 주민 123명을 살해하고 오전 9시경 방곡에서 주민 212명을 죽였다. 오후엔 함양군으로 넘어가 휴천면 점촌과 유림면 서주리에서 주민들을 살해한 후 다시 거창으로 넘어갔다. 경남 거창군 신원면 대학살은 2월 9일 청연마을에서 시작했다. 주민 84명이 죽었다. 10일엔 탄량골에서 군인 경찰 향토방위대원의 가족 100명을 먼저 죽이고 11일엔 와룡리 대현리 중유리 등 주민 517명을 신원초등학교에서 700미터 떨어진 벽산골로 끌고 가 학살했다.

◆정부의 불법과 은폐를 꾸짖다 = 국민방위군 간부의 예산 착복에 대한 국회의 재수사는 이를 은폐하려는 이승만정부를 뒤집어놨다.

국민방위군은 물밀 듯이 내려오는 중공군에 맞설 청년들로 급조된 '제2 국민병'이다. 국회는 국민방위군 설치법을 통과시켰고 1951년 1월30일 3개월분 209억원의 예산도 지원했다. 50만명의 식량도 제대로 조달하기 어려운 액수인데도 사령부의 고급간부들이 보급품을 착복하고 예산을 횡령했다. 수만명이 굶거나 영양실조로 죽었다. 집단탈출이 이어지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사령부는 이승만 대통령의 측근들로 구성돼 있었다. 정부는 간부 몇 명을 기소해 무마시키려 했다.

국회가 자체 재조사에 나섰다.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윤근, 부사령관 윤익헌, 재무실장 강석한, 조달과장 박창언, 보급과장 박기환 등 국민방위군 간부들이 방위군 예산 10억원을 착복하고 정치권에 수천만원의 자금을 제공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시영 부통령이 사표를 내고 재개된 군법회의에서 5명의 간부에 사형을 선고했다.

5월12일 본회의에서는 '국민방위군 사건과 모 정파와의 관련성 유무의 건 조사보고'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다. 조봉암 의원은 "국민방위군 안에서 많은 국비가 낭비되었는데 그 가운데 좋지 않은 돈이 우리 국회의원 혹은 국회의원에 관계있는 단체에 들어와 있지 않느냐 하는 것이 우리 국회에서 제일 중대한 문제"라면서 "국민방위군에서 돈 1억원가량 큰 뭉치로 되는 돈을 짚차에 실어갔는데 그 가져간 사람은 누구냐 하면 신정동지회의 사무국장(조영환) 같으라 그런 것이 우리가 문제되고 있는 초점"이라고 설명했다. 남송학 의원은 "어떠한 듣는 말, 조작한 말, 추측하는 말로써 동지를 갖다가 모욕한다고 하는 것은 용인할 수가 없다"며 "신정동지회로서는 도저히 용인할 수가 없는 줄로 나는 생각하는 바"라고 반박했다.

부정한 정치자금을 받았던 정계의 인사들에 대한 처벌과 상납된 자금에 대한 수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한국 의정사 100년을 걷다 연재기사]

박준규 기자 jkpark@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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