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의정사 100년을 걷다 | (17) 이승만 재선 위한 첫 개헌

직선 대통령제 '이승만'-내각제 '국회'의 한판 대결

2019-08-01 11:16:05 게재

첫 직선제 부결되자 자유당·경찰 동원, 압박하며 강제 표결

헌법·법률 절차 무시하고 공고·토론없이 '발췌개헌안' 통과

이 대통령, 여소여대 속 재선 불가 판단 … 직선제 개헌 강행

첫 개헌은 전쟁 중에 부산에서 이뤄졌다.

1950년 5월 총선에서 여당이 참패했다. 제헌국회때 참여하지 않었던 중도세력과 남북협상세력이 대거 무소속으로 당선돼 압도적인 '여소야대' 국회가 됐다. 1952년 대선에서 국회의원에 의해 뽑는 간선제로는 이승만 대통령의 재선이 불가능했다.

이 대통령이 무리수를 뒀다. 첫 개헌이 발췌개헌, 부산정치파동이라고 불린 이유다.

왼쪽 사진은 1952년 5월26일 출근길 국회의원 강제연행 장면, 오른쪽은 7월4일 발췌개헌안 표결결과. 사진제공 국회도서관


◆직선제 개헌안 부결 = 이 대통령은 1951년 8.15 기념사에서 대통령 직선제와 양원제로의 개헌 필요성을 제기하고는 11월28일에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12월에 자유당을 창당했다. 개헌안이 국회에 상정된 것은 1월 17일이었다. 허정 국무총리서리가 제안 설명을 했다. 1월18일에 표결에 들어갔다. 163명이 투표에 참여해 가 19표, 부 143표, 기권 1표로 부결됐다.

이 대통령이 국회의원 소환제를 들고 나왔다. 2월16일에 이 대통령은 담화를 통해 "유권자들이 자기 대표를 소환한다는 것은 법리적으로 부당한 일이 아니다"고 했다. 개헌을 부결시킨 국회의원을 소환해야 한다는 내용의 벽보가 전국에 나붙었다.

국회는 같은날 본회의를 열고 국회의원 소환 벽보사건 조사위원회 구성과 국회의원 소환설과 관제데모사건 조사의 건을 가결했다. 서민호 의원은 "헌법에 보이고 있지 않는 국회의원 소환 운운에 대해서 어떠한 단체에서는 각 곳에 지령을 내려 가지고 전국적 소환대회를 개최한다는 이러한 말을 공공연히 하고 있다"며 자유당의 중앙본부에서 각 지방에 보낸 문건을 공개했다. 그 문건의 제목은 '개헌 부결한 배신 국회의원 규탄운동 전개의 건'이었고 "정부에서 제안한 개헌안을 부결한 배신 국회의원을 규탄하는 국민대회를 각지에서 개최하여 개헌 지지 결의문을 국회와 본당에 보낼 것"이라고 지시했다.

1952년 7월4일 기립투표 장면. 사진제공 국회도서관


◆'개헌부결의원 소환' 주장 = 2019년 국회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국회의원 소환제가 이때 처음 나왔다.

2월19일엔 9명으로 구성된 국회의원 소환문제 처리 특별위원회의 중간보고가 있었다. 이 자리에서 특위 위원인 엄상섭 의원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12개 항목의 질의서를 제시했다. "헌법에서 금지되어 있지 않은 일은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고 보는가"라거나 "만일 그렇다고 하면 우리 헌법에 국민은 대통령을 파면할 수 없다는 조문이 없다고 해서 주권자인 국민은 언제든지 대통령을 파면한다는 결의를 하면 법적 효과가 발생할 것으로 볼 것인가" 등을 따져물었다. "우리 헌법은 국회의원의 임기를 4년으로 정했고 국회의 해산에 관한 규정도 없으니 그 임기 내에는 국회의원의 지위가 보장되는 것이며 따라서 국회의원 소환이 금지돼 있다는 것이 명백하지 아니한가"라고 되묻기도 했다.

4월17일 곽상훈 의원 외 122명이 내각책임제를 중심으로 한 개헌안을 내놨다. 이 대통령은 야당계 거두인 국무총리 정면을 해임했다.

◆내각제 개헌안 나오자 터진 서민호 사건 = 이때 서민호 사건이 터졌다. 지방선거 시찰차 떠난 무소속이면서 내각제 추진파인 서 의원이 전남 순천에서 언쟁 끝에 현역대위를 사살했다. 정부는 5월12일 국회의 석방결의를 무시하고 구속기소했다. 그러고는 이틀후 이 대통령은 이미 부결된 양원제와 정부 직선제를 조금 수정한 개헌안을 제출했다.

1952년 5월 30일 국회 포위한 시위대. 사진제공 국회도서관


정부에서 동원한 민족자결단, 백골단 등 폭력조직와 관제 데모대가 국회의원 소환, 국회 해산을 요구하며 신익희 국회의장 집을 포위하기도 했다. 급기야 5월26일에는 50여명의 국회의원이 탄 통근버스가 헌병대에 강제연행됐다. 이 사건은 미국 대통령의 비난각서로 이어졌다. 국제공산당에 관련됐다는 혐의로 의원 10명이 붙잡히기도 했다.

◆장택상 총리 지휘하에 발췌개헌 추진 = 6월3일에 이범석과 신라회(이승만측근인 장택상 총리가 만든 원내친목모임)를 주축으로 정·부통령 직선제, 양원제, 국회의 내각 불신임제 등을 담은 발췌개헌을 추진했다.

6월20일에 민중자결단이 국회의사당을 포위하고 80여 의원을 구금했으며 이시영 김성수 장면 김창숙 등 야당인사가 국제구락부에 모여 구국선언을 하려다 괴한들의 습격을 받기도 했다. 같은 날 이 대통령은 "발췌개헌안 불채택시 국회해산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7월3일에 개헌안 심의를 위해 10명의 의원을 석방하고 본회의 출석을 거부한 의원은 경찰서로 강제호송됐다. 다음날인 7월4일에 개헌안 통과를 위한 본회의가 소집됐다.

당시 회의록에 따르면 회의는 오후 7시58분에 열렸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이 낸 안이 아닌 별도의 '신라회안'이 전원위원회에서 수용됐고 그 안을 중심으로 토론하자는 결론이 올라왔다. 박정근 의원이 이의를 제기했다. 신라회의 발췌안이 새로운 개헌안인 만큼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취지였다. 이에 서이환 의원은 "정부 제출 개헌안과 국회 제출 개헌안을 발췌하였다고 하는 발췌 종합안이라고 하는 안은 제3안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임시의장 신익희는 "발췌한 안이라 한다든지 종합안이라고 하면 아무리 설명을 한다고 할지라도 제3안으로 되는 감을 갖게 되는 까닭으로 이것을 안이라고 하지 말고 '발췌한 조항'이라고 하자는 의견을 설명했다"고 말했다. 법안이 아니라 조항이므로 제3안이 아니라는 논리다.

그러고는 곧바로 이종형 의원이 발언권을 얻어 "발췌 조항을 2독회 3독회 다 생략하고 한 번에 표결하자"고 했다. 독회와 토론이 생략된 채 기립표결에 들어갔다. 신 의장은 "이 개헌안을 표결한 결과가 재적의원 3분지 2 이상 즉 166명 출석으로 가에 163표, 부에는 한 표도 없이 찬성이 되었음으로 이 개헌안은 가결된 것을 선포해 드린다"고 말했다. 기권이 3표였다. 부산의사당 밖에는 여전히 경찰이 포위하고 있었다. 저녁 9시30분에 산회됐다. 새로운 개헌안 통과에 한시간 반 걸렸다. 이승만 대통령은 8월5일 실시된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재선됐고 8월15일에 취임했다.

첫 개헌은 헌법과 법원리를 어겼다. 일사부재의 원칙을 위배했고 헌법이 정한 공고절차와 독회, 토론절차를 거치지 않았다. 표결도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방법으로 진행됐다.

직선제를 고수하려다 무리하게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를 조합했다. 양원제를 도입했지만 참의원 선거는 없었다. 국무위원 조각권과 국회의 내각신임권은 2년뒤 개헌으로 한번도 실현되지 못한채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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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규 기자 jkpark@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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