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의정사 100년을 걷다 | (18) 14년간 한일협상

비공개 합의에 야당, 학생과 손잡고 장외·단식투쟁으로 저항

2019-08-22 12:53:03 게재

"여당 사전수수설 제기" 논란 확산

1961년 합의 내용 국회도 전혀 몰라

최근 한일관계의 쟁점으로 부상한 '1965년 한일협정 합의'와 관련한 논의는 1951년부터 시작했다. 무려 14년간의 지루한 논의가 진행됐다.

1965년7월2일 여야영수회담 | 한일협정 비준과 월남파명 등 민감한 정치 현안과 대홍후 피해로 정국의 혼란이 극에 달하자 박정희 대통 령과 통합야당인 민중당의 박순천 당수가 영수 회담을 가졌다. 자료 제공 국회 도서관


한국전쟁중에 열린 1951년 10월 22일 본회의는 일본의 한일협정 협상태도에 대한 성토장이었다. 방민수 의원은 "한일회담에서의 일본 측 대표로 일개 사무관이 출석하고 있다는 보도"를 거론하며 "이네들이 우리 정부를 어찌 보고 있는 것이며 우리 외교 진영을 얼마만치 눌러보고 하는 행동인가 하는 것을 생각할 때에 그야말로 치가 떨리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일본 정부에서 더욱더 멸시하고 경시하는 태도로 나올 것이라고 보는데 우리 정부로서는 여기에 대해 어떤 대책이 있느냐"고 따졌다. 변영태 외무부 장관은 "일본정부가 대일강화조약을 인준하기 위해 국회가 열려 있는데 여러 가지로 바쁘니 한일회담에 대해서는 그렇게 전력을 쓸 수가 없다는 것을 몇 번 얘기해왔다"면서 "체면에 손상이 된다고 해석할 필요는 없다"고 답했다. 그러고는 "이번 회담을 자기나라 정부의 총력을 기울여가지고 진지하게 대해주는 가 하는 것이 의문으로 되어 있을 정도"라고 평가했다.

같은해 11월15일 본회의에서는 한일회담에 관한 질의가 비공개로 진행됐다. 정부측 장관들과 의원들의 의견 교환이 있었다. 관련 회의록은 공개되지 않고 있다.

1964년 6월3일 대일외교 반대데모


1953년 11월24일에는 한일회담에 관한 건의안이 가결되기도 했다. 정일형 외무위원장 대리는 '한일회담에 관한 긴급건의안'과 관련 "지난 11월 21일 박영출 의원 외 12명의 의원이 한일회담에 관한 긴급동의안을 제출했다"며 "3차례에 걸쳐 한일회담을 해왔지만 일본이 재래의 주장인 재산권 문제, 어업권 문제 등 중요한 문제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본 수석대표 구보전씨의 발언은 오만무례할 뿐만 아니라 모욕적인 언사를 썼기 때문에 결렬이 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일본 국내에서는 이 한일회담에 대한 무례한 선전공작에 노력해 온 것을 기억하실 것"이라며 "우리도 국제여론에 호소할 뿐만 아니라 일본의 조야 여러분들에게 맹성을 보구하는 의미에서 이 건의안을 제출한 것"이라고 했다.

◆빨라진 협상시계 = 1961년 군사정변을 일으키고 1962년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현실화하기 위한 자금의 필요성이 재기되면서 한일 회담에 속도가 붙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한일 양국의 이견이 크고 내부의 반대투쟁이 심해 타결이 미뤄지고 있었다.

1964년6월4일 시위진압하는 계엄군


박정희정부는 1962년 11월12일에 김종필-대평(오히라) 회담에서 '비밀메모'(일명 김-오히라 메모)를 통해 대일 청구권 문제 등에 합의해줬다. 이러한 협상내용은 2년 동안이나 비밀에 부쳐졌다. 김-대평 합의에 대한 소문들이 퍼져나갔다.

1963년5월 김병로 등 재야 정치인들이 군사정부의 한일회담 중단과 민간 이양, 김종필-대평 합의내용 공개를 요구하고 나섰다. 그 내용은 1964년 3월 한일회담의 3월타결-4월조인-5월 비준이라는 정부방침과 함께 드러났다. 3월6일 민정당과 삼민회 등 야당이 '대일저자세 외교반대 범국민투쟁 위원회'를 만들었다. 24일엔 서울대 연대 고대 수천명의 학생들이 한일회담 반대 데모에 나섰고 다음날엔 전국으로 확산됐다. 26일 학생운동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김준연(영암·강진, 삼민회) 의원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공화당이 한일회담과 관련해 일본으로부터 이미 1억불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 발언의 진의를 확인하기 위해 특위가 구성됐다. 김 의원은 4월2일에 "공화당이 지난 1963년도의 선거자금으로 일본에서 2000만불을 수수했고 대일 청산계정 4700만불도 이미 사용했다는 설이 있으니 경위를 밝히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김준연의 폭로와 김대중의 필리버스터 = 공화당은 허위사실 유포죄로 김 의원을 고발했고 김 의원은 박정희 대통령과 민주공화당 의장 김종필 의원을 외환죄로 고소했다. 공화당은 무고죄로 맞고소했다.

4월20일 정부는 김 의원의 구속동의요청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이때 재선의 김대중 전 대통령의 5시간 19분짜리 필리버스터가 나온다.

결국 구속동의안은 회기내 처리하지 못했고 폐회 직후인 4월26일에 김 의원이 구속 수감됐다. 김 의원은 한달뒤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한일회담 반대데모를 찬단하기 위해 6월3일 박정희 대통령은 서울시 전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6월10일 임시국회에서 민정당과 삼민회는 비상계엄해제와 학생 및 군이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자는 수습방안을 제시했다. 박 대통령은 국회에 나와 '시국수습에 관한 대통령교서'를 통해 "불행한 사태가 재발치 않을 확실한 보장의 선행없이는 계엄해제만이 시국수습방안일 수 없다"고 버텼다.

이효상 국회의장의 중재로 공화당과 민정당 삼민회 24명의 의원들이 시국수습협의회를 만들어 '계엄해제요구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국회 본회의 표결결과 찬성 139표 기권 3표로 가결됐다.

1965년 2월18일 한일 기본관계조약의 가조인을 위해 시이나 일본 외상이 방한했다. 민정당과 민주당은 합동의원총회를 열고 투쟁방안을 논의했다. 민주-민정당과 재야인사들이 대일 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 위원회를 만들고 3월28일과 29일에 광주 마산 속초 진주 여수 강릉 등에서 유세를 벌였다. 장외투쟁에 나선 것이다. 민주-민정당은 5월 14일에 합당, 민중당을 만들고 박순천씨를 당수로 선출했다.

한일양국은 6월22일에 14년동안 끌어온 한일 국교정상화를 비롯한 협정에 정식 조인했다. 23일에 민중당소속 의원 50명이 한일협정 무효를 선언하면서 국회본회의장에서 24시간 단식투쟁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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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규 기자 jkpark@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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