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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 헌법 "예산증액, 정부 동의 받아야"

2019-10-24 11:14:00 게재

정부에 강력한 예산편성권 부여, 심사권 제한

군사정권때 국회 예산심사기간 축소하기도

정부의 막강한 예산편성권은 1948년 제헌국회의 제헌헌법부터 굳건히 자리를 지켰다. 제헌헌법은 제 7장 재정부문에서 "정부는 국가의 총수입과 총지출을 회계연도마다 예산으로 편성하여 매년 국회의 정기회 개회초에 국회에 제출해 그 의결을 얻어야 한다"면서 "국회는 정부의 동의없이는 정부가 제출한 지출결산 각 항의 금액을 증가하거나 또는 신비목을 설치할 수 없다"고 규정했다.


국회가 정부에서 짜 온 예산안을 심사하면서 증액하거나 삭감해야 하는데 증액하거나 증액하기 위해 새로운 비목(지출항목)을 만들 때는 반드시 정부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얘기다. 깎는 것은 문제없지만 증액은 맘대로 할 수 없게 열쇠를 채워 놨다.

이 원칙은 현재도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정부의 예산안 편성을 감시하고 견제하기 위한 입법부의 심사권도 마련됐다. 제헌헌법에서는 국채를 모집하거나 예산외의 국가의 부담이 될 계약을 할 때에는 국회의 의결을 필수요건으로 못 박았다. 예측할 수 없는 예산외의 지출 또는 예산초과 지출에 충당하기 위한 예비비도 국회의 의결을 얻도록 했다. '조세의 종목과 세율을 법률로써 정하도록' 한 조세법률주의도 들어갔다. 세금을 새롭게 만들거나 세율을 변화시켜 세수를 올리거나 줄일 수 있겠지만 이를 반영한 세법을 통과시킨 이후에만 적용할 수 있다는 논리다.

◆새롭게 추가된 국회 심사권들 = 3번째 개헌에 의해 만든 4번째 헌법(1960년, 내각제 개헌)에서는 '준예산제도'가 도입됐다. 국회가 정해진 기간내에 예산을 의결하지 못한 경우 국회에서 예산이 의결될 때까지 정부가 전년도 예산에 준해 세입의 범위내에서 지출할 수 있게 했다.

본회의장 의석에서 식사하는 유진오 김영삼 | 1967년 12월 20일, 예산안 통과저지를 위해 본회의장에서 농성중인 야당의원들이 농성장을 떠나지 않으려고 의석에서 설렁탕으로 저녁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 왼쪽이 유진오 신민당 당수, 오른쪽이 김영삼 의원. 사진 국회 도서관 제공


5번째 개헌으로 만들어진 6번째 헌법(1962년)은 추가경정예산안을 편성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줬다. 대통령 직속으로 감사원을 만들어 세입·세출의 결산을 맡겼다.

가장 큰 폭으로 변한 대목은 '정부의 예산안 제출일'과 '국회 통과 마지막날'이다. 제헌헌법에서는 정기회 회기 초에 정부가 예산안을 내면 국회가 다음 회계연도 개시전까지 의결하도록 의무화했다. 10월초에 내고 12월말까지 의결하는 모양새로 그려진다. 국회는 최장 석달간 심사할 수 있다.

6번째 헌법(5차 개헌)에서는 회계연도 개시 120일전까지 국회에 제출하고 국회는 회계연도 개시 30일전까지 의결하게 했다. 정부의 예산안이 국회로 들어오는 시점을 30일정도 앞당긴 것이다. 의결도 30일 빨리 하도록 했다. 확정된 예산안을 실제 집행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을 벌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8번째 헌법(7차 개헌, 1972년, 유신헌법)은 정부의 예산안 제출시점을 다시 '회계연도 개선 90일전'으로 30일 늦췄다. 의결의무시점은 그대로 둔 채 제출일만 미뤄둔 것은 국회의 심의권을 축소한 것으로 정부의 편성권에 더 무게를 둔 조치다. 헌법상으로는 국회의 예산안 심사기간이 최장 60일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이러한 기조는 8차 개헌으로 나온 9번째 헌법뿐만 아니라 민주화운동으로 만들어낸 10번째 헌법(9차 개헌)까지도 이어졌다.

◆늦어지는 예산안 심사 = 회계연도 개시 90일 전인 10월2일에 내면 심사준비를 하다보면 10월 중하순이 돼야 첫 회의를 열 수 있다. 그러다보니 예산안 의결 의무시점을 지키지 않고 연말까지 여야간 공방을 이어가는 경우가 관행적으로 나타났다. 국회 기록물에 따르면 1968년 12월 하순에는 예산안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여야간 대결국면이 본회의장에서 펼쳐졌다. 12월20일 신민당 의원들이 예산안 통과를 막기 위해 국무위원석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장기 농성에 들어가기도 했다. 같은날 공화당 의원들도 그 옆에서 대결농성을 시작했다. 12월27일 유진오 신민당수와 김종필 공화당 의장이 협상을 이어갔지만 결국 합의점을 찾지 못하자 다음날인 12월28일 오전 1시5분에 공화당 의원들만으로 날치기 통과되기도 했다.

["한국 의정사 100년을 걷다" 연재기사]

박준규 기자 jkpark@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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