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대응 '영상재판' 시연 … 상용화 시동 걸리나

2020-03-05 11:36:19 게재

서울고법, 법정·판사실서 영상 재판

'재판은 법정에서' 공식 깨질까 관심

"화상회의 방식의 변론 준비절차를 실제 진행해보니 희망적인 생각에 우려가 섞인다. 대부분 불완전한 시스템으로 인한 걱정이다."

지난 2018년 영상재판을 시연한 한 법관이 사법정책연구원 주최 심포지엄에서 밝힌 심정이다. 당시 영상재판에 대한 기대보다는 우려가 많았다. '재판은 법정에서 해야만 한다'는 보수적 법조계 태도의 영향도 컸다. 사법농단 수사가 이어지고, 법원행정처의 전자법정사업 비리가 이어지면서 영상재판은 애물단지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인해 상황은 180도 달라졌다.

코로나19 여파로 전국 법원들이 휴정기에 들어간 가운데 4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코로나19 대응 방안으로 영상재판이 시행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2일 김창보 서울고등법원장은 변론준비절차에서 원격영상재판 제도를 적극 활용해달라고 민사재판부에 요청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재판을 무작정 늦출 수 없는 상황에서 나온 묘수다. 이에 화답하듯 고법부장판사들이 나서기 시작했다.

◆화면 보며 재판 진행 = 4일 오후 서울법원종합청사 305호 법정. 고법 민사5부 김형두 재판장이 홀로 법대에 자리를 잡았다. 재판장 오른쪽에 대형 스크린이 펼쳐졌고, 재판장을 지원하는 일반직원들은 원래 자리가 아닌 증인석쪽에 자리를 잡았다.

김 재판장이 "원고·피고 대리인 나오셨나요"묻자 스피커에서 "네. 출석했습니다"라는 목소리가 나왔다. 스크린은 큰 영상 1개와 작은 영상 2개 등 3개로 분할돼 김 재판장과 원·피고 측 대리인인 변호사들의 영상이 나왔다.

원고가 피고에게 코스닥 등록 회사를 넘기는 과정에서 수억원의 담보금을 줬는데, 인수절차가 마무리 됐으니 담보금을 돌려달라는 소송이다. 김 재판장은 변호사들의 동의를 받고 영상재판 방식으로 준비절차를 20분간 진행했다. 시범재판부가 영상재판을 진행한 적 있지만 일반재판부는 이날이 처음이다. 김 재판장은 법정에서 준비절차를 진행했고, 변호사들은 각자의 사무실에서 원격으로 접속해 재판에 참여했다.

합의부로 이뤄진 재판은 재판장과 좌·우배석이 함께 하지만 준비절차라는 점에서 수명법관 1인이 진행할 수 있다. 이번 시연은 재판장이 주심이기 때문에 주심이 수명법관으로서 홀로 진행했다.

일반 재판은 재판장의 말로 제어가 되지만 이날 재판에선 재판장이 프로그램을 직접 제어해야 했다. 김 재판장이 소송기록 목록을 열어 '합의서'를 선택하자 화면 중앙에 합의서가 등장했다. 이후 쟁점과 증인신문 계획, 사실 조회에 대해 재판장이 양측 의견을 물었고, 변호사들은 각각 의견을 밝혔다. 말하는 사람이 큰 영상으로 나오는 방식이다.

5일과 6일 서울고법의 다른 민사재판부도 일부 판사들이 자신의 사무실에서 준비절차를 영상으로 진행키로 했다.

서울고법 관계자는 "법정과 판사실에 이어 재택근무도 가능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스마트 법원 가속화될 듯 = 2년전 영상재판을 시연해 본 한 지방법원 부장판사는 영상재판으로 인해 업무 하중이 더 늘어날 수 있다고 우려한 바 있다. 그는 심포지엄에서 "영상재판에 적합한 사건을 선정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며 "영상통화 연결 방식은 재판부로서 효율성이 떨어지고, 업무 증가와 효율성 제고는 전반적으로 검토가 필요하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기술적 문제보다 법원의 구조적 문제가 비대면 재판 등 스마트 법원으로 변신하는데 걸림돌이라는 것이다.

현재 법원은 형사소송을 제외하고 기록 전자화는 상당 부분 진행된 상태다. 민사소송은 물론 가사·행정·도산 사건 역시 전자소송이 도입됐다.

2015년 4월 이준석 선장 등 세월호 승무원 15명에 대한 형사사건 항소심에는 법정간 중계방송이 이뤄진 적이 있다. 당시 광주고법에서 선고공판을 여는데 유족들을 위해 수원지법 안산지원 법정과 광주고법 법정을 연결해 유족들이 재판을 지켜볼 수 있도록 했다.

이날 영상재판 시연 소식에 일선 판사들의 기대감도 커졌다.

상대적으로 새로운 기술에 보수적인 고참급 판사들이 신기술 도입에 적극적인 모습도 고무적이다. 큰 예산도 필요하지 않다. 기존에 보급된 노트북을 그대로 사용했고, 법정에서 쓰던 대형 스크린(실물화상기)이면 문제없다. 영상회의를 위한 프로그램 사용료만 법원행정처가 지불하는 형식이다. 변호사들도 공인인증서 등을 통한 절차만 거치면 접속할 수 있다.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 있지만 노트북이 아닌 스마트폰과 태블릿PC로 재판을 진행하거나 참여할 수 있다.

수도권의 한 고법판사는 "법원이 가장 보수적인 곳인데 코로나로 인해 비대면 재판이 속도를 내고 있다"면서 "기술적 장애는 거의 없고, 판사 부족이나 판결문 공개, 재판 영상녹화, 형사재판 전자화 등 해묵은 과제에 대한 논의도 빨라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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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완 기자 osw@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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