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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물리학상 120년의 교훈② - 연구지원, 뿌리부터 바꾸자

2021-12-03 12:20:19 게재
박인규 서울시립대 교수 물리학과

'과학적 큰 질문'을 찾는 일은 사실 쉬운 일이다. 이런 질문은 숨겨져 있지 않고 공개돼 있기 때문이다. 중력파나 힉스입자의 존재, 중성미자의 질량, 블랙홀의 관측 등은 오랫동안 잘 알려져왔던 문제들이었다.

노벨상이 될 만한 큰 질문들은 아직도 수두룩하다. 그럼 우리도 그런 문제에 뛰어들기만 하면 노벨상이 나올까? 기초과학 선진국들이 한 세기에 걸쳐 이루어 놓은 연구 인프라를 한순간에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하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우리의 연구 방식을 밑바탕부터 다시 생각해 봐야 할 때다.

연구지원 방식 대전환이 필요한 이유

우리나라에서 물리학 연구를 위해 대형연구시설이 건설된 것은 포항공대의 방사광가속기가 최초다. 당시 돈으로 1500억원이 넘는 건설비가 투입됐다. 이어 건설된 4세대 방사광가속기는 4000억원이 투입됐고, 지금은 1조원 가까이 드는 새로운 방사광가속기의 건설이 예정돼 있다. 또 경주에는 3000억원이 투입된 양성자가속기가 운영 중이고, 세종시 인근에는 1조4000억원 예산의 중이온가속기 건설이 한창이다.

이외에도 조 단위 구축비용이 들어가는 대형연구시설 수요는 계속 늘고 있다. 현재 과학자들이 계획하는 조 단위 대형연구시설만 해도 4~5개가 된다. 우리나라 R&D 예산이 연간 27조원인 데 비하면 수년에 걸쳐 10조~20조원을 대형연구시설 건설에 사용하는 게 큰 규모는 아닐 것이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노벨상이 나올 것인가?

사실 문제는 예산 규모가 아니라 예산의 투입 방식에 있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예산 투입 방식은 전통적으로 '로비'에 의존해왔다. 앞서 언급한 시설들은 모두 정치적 산물이기도 했다. 새 정권이 탄생할 때, 큰 국책사업에 대한 보상 차원으로, 또는 국회의원들의 지역구 공약에 의해 탄생한 경우들이다. 이런 경험 때문에 대형연구시설을 계획하는 과학자들은 성패의 핵심이 '어떤 연구를 할 것인가'보다 '어떻게 정치권을 설득할 것인가'에 있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로비 방식이 나쁘고 불법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보통 대형연구시설을 필요로 하는 연구집단은 대략의 건설의향서를 작성해 담당 부처와 협의한다. 연구비 투입이 왜 필요한지 국민들을 설득할 수 있는 정책보고서도 작성해야 한다. 해외에서도 비슷한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는지도 꼼꼼히 검토한다. 그후에야 주무 부처가 예산을 계획하기 시작한다. 여기에는 어떠한 불법도 불공정도 끼어 있지 않다.

이렇게 만들어진 정부의 예산 투입 계획은 다음으로 기획재정부의 심의를 거친다. 소위 예비타당성조사 단계다. 노벨상 할아버지가 와도 기재부의 예타조사를 통과하지 못하면 예산은 책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대형연구시설 건설을 목표로 하는 과학자 집단은 예비타당성조사 준비에 혼신의 힘을 쏟는다. 여기에서도 어떠한 불법이나 불공정이 끼어 들 틈이 없다.

모든 것이 합법적으로 진행되는데 그럼 무엇이 문제인가? 이런 대형 연구계획의 승인은 연구내용과 목표보다 연구시설 건설 가능성과 예산규모, 건설계획에 초점이 맞춰져 평가된다 기재부가 정밀히 들여다 볼 수 있는 영역은 그뿐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로비'형 대형연구사업 추진 방식의 문제점이다. 장기적 비전과 사업들 간의 연계성이 없이 모두 개별 사업으로 거대 연구시설이 건설돼온 이유다.

스노우매스 회의에서 배워야 할 것들

반세기 전 미국도 현재 우리와 비슷한 방식으로 연구시설들을 만들었다. 당시 학계는 대형연구시설의 건설이 '과학의 관점'에서 결정되어야 한다고 정부를 설득했다. 그리하여 1982년 스노우매스(Snowmass)란 특수목적 전문학술대회가 탄생했다. 첫 개최지인 콜로라도 스노우매스란 지역의 이름을 딴 이 회의에서는 고에너지물리학의 방대한 연구현황과 미래의 연구 계획에 대한 발표들이 이루어지고, 분야의 중장기적인 목표와 전략이 설정되고, 건설의 우선순위가 논의된다. 그리고 이에 맞춰 어떤 대형연구시설이 우선돼야 하는가를 결정한다.

서로 다른 분야의 과학자들이 모여 어떤 연구에 집중하고 어떤 시설을 건설할지 결정하는 것은 그 자체로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또다시 각개전투의 상황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그들은 결국 합의를 이끌어낸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연구자 개인 또는 연구집단이 각각 정부 부처를 설득하는 것이 아니고, 우선 과학자 커뮤니티가 어떤 연구와 어떤 시설을 지어야 할지를 먼저 결정하고 나서 정부에 제안하는 방식이다.

기초과학에 투자되는 기초 연구비 예산도 지원방식을 과감히 바꿀 때가 됐다. 27조원의 정부 R&D 예산 중 기초과학 지원 예산은 2조원이 넘는다. 이중 1조5000억원 정도는 대학 연구실 등 개별 연구를 지원하고, 3000억여원은 집단연구를 지원한다. 결코 작은 예산이 아니다.

기초과학은 사업이 아니라는 인식전환을

많은 개인 연구자들에게 골고루 지원하는 연구비는 규모도 크지 않지만, 평가와 관리가 쉽도록 평균 3년 단위로 끊는다. 과학자들도 이에 맞춰 연구목표를 잘게 쪼개 짧은 연구기간에 마칠 수 있도록 계획을 짠다. 연구 형태도 환경에 맞춰 진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연구가 끝나면 다시 경쟁을 통해 새로운 연구과제를 수주해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 과정을 무한반복 해오고 있다. 그러니 어찌 한 연구에 오래 집중해야 하는 '과학적 큰 질문'에 도전할 수 있겠는가?

어찌 보면 소규모 자영업자가 많은 우리나라의 산업구조와도 흡사하다. 이렇게 공정한 경쟁과 투명한 심사, 지역 안배와 분야별 예산 분배, 최대한 많은 연구자들에게 수혜가 가도록 하다 보니, 적은 예산으로 나누고 짧고 빠르게 회전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된 것이다. 이는 정부의 연구개발이 모두 성공으로 끝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과학연구는 점점 대형화되고, 공동연구 형태로 진화되고 있다. 이러한 형태의 선도적인 과학연구를 위해서는 이제 우리도 과학자들이 먼저 '큰 질문'을 정하고 그것을 해결하고자 뭉쳐야 한다. 그리고 정부는 과학자들의 결정을 믿고 지원해주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과학연구가 정부의 '발주사업'이다. 사실 과학은 사업이 될 수 없다. 사업계획서에 따라 투자를 받고, 사업을 수행하고, 매출을 얻어 정해진 기간에 엑시트를 하는 것은 과학의 목표가 아니다. 진심으로 노벨상을 원하는가? 그러면 과학자가 '사업'에서 손을 떼고 '연구'를 하게 해야 한다.

박인규 서울시립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