궤도노동자 안전보건

유해물질 노출, 육체적 피로에 감정노동까지

2022-04-26 11:08:11 게재

철도·지하철 노동자 산재 현실 증언 … "직무별 건강영향평가 실시해 맞춤형 관리해야"

4월 28일은 '세계 산재노동자 추모의 날'이다. 1993년 태국 장남감 인형공장 화재로 숨진 188명의 노동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1996년 4월 28일 국제자유노조연맹(ICFTU) 대표들이 촛불을 들면서 시작됐다. 미국 캐나다 영국 등 세계 19개 나라에서 4월 28일을 국가추념일로 공식 인정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아직 공식추모일이 아니다. 현재 노동계만의 행사로 그치고 있다.
시민들의 교통수단인 철도·지하철이 개통된 이후 2547명의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었다. '세계 산재노동자 추모의 날'을 앞두고 22일 철도·지하철 노동자들의 산업재해의 문제와 대안을 논의하는 국회토론회가 열렸다. 토론회에는 △승무 △차량 △역무 △기술 4개 직종 노동자들이 참여해 노동환경을 증언했다.

안전 방해 요소 제거 퍼포먼스│5일 서울 종로구 대통령 인수위원회 앞에서 열린 4월 노동자 건강권 쟁취 투쟁의 달 선포 기자회견에서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안전 방해 요소를 제거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종찬 기자


#. 2019년 10월 경남 밀양역 근처 곡선구간에서 선로 보수작업 중이던 노동자 3명이 새마을호 열차에 치였다. 25년 철도에 몸담았던 A씨는 사망하고 2명은 크게 다쳤다. 600m 떨어져 있던 열차감시원이 무전으로 열차 진입을 알렸지만 작업 굉음 때문에 들을 수 없었다. 이날 작업에는 7명의 인력이 필요했지만 5명만 투입됐다.

#. 2020년 7월 지하철 승무원 B씨는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승객이 있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해 "코로나19 예방을 위해 마스크를 써 달라"고 안내했다. 하지만 승객은 "마스크를 쓰고 안 쓰고는 내 자유"라며 거절했다. 재차 마스크 착용을 안내하자 승객은 B씨를 폭행했다.

#. 화물열차 운전기관사 C씨는 운행 중 고라니를 치었다. 사람을 친 줄 알고 놀란 C씨는 정신적인 충격을 호소하다 뇌경색으로 사망했다. 법원은 기관사의 교번근무제에 의한 불규칙한 업무수행과 이에 따른 육체적 피로와 스트레스, 그리고 고라니를 치인 사고가 C씨를 죽음에 이르렀다고 판단했다.


"철도(1899년)·지하철(1974년) 개통으로 시민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교통수단으로 자리 잡았지만 안타깝게도 개통 이후 산업재해로 2547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한인임 일과건강 사무처장의 말이다.

4월 28일은 '세계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이다. 공공운수노조, 전국철도지하철노조협의회(궤도협의회)와 정의당 심상정·이은주·강은미 의원은 22일 서울 영등포 국회의원회관에서 '철도·지하철 노동자들의 산업재해 현실과 과제' 토론회를 열었다. △승무 △차량 △역무 △기술 4개 직종 노동자들이 노동환경을 증언했다.

전동차 정비창에서 차체 상차 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 전국철도지하철노조협의회 제공


◆교번근무제, 일반 교대근무보다 심각 = 철도·지하철 승무 분야 노동자는 지하공간에서 혼자 운전하면서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 C씨처럼 열차운행 스케줄에 맞춰 근무하는 교번근무제로 일한다.

한창운 궤도협의회 노동안전보건위원장은 "기관사들은 교번제 근무라는 불규칙한 생활리듬을 만성적으로 조장하는 근무형태에 맞춰 일한다"며 "승무원은 교번·단독·차상 근무의 특성 때문에 일반 교대근무보다 육체적 피로, 생활적 소외와 비인간성, 정신적 스트레스, 책임에 따른 심리적 부하가 심각하다"고 말했다.

2015년 안전보건공단의 철도기관사 직업건강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기관사들은 일반 인구집단보다 공황장애 4배, 우울증 2배, 외상후 스트레스장애는 4배였다. 이들은 승객 민원에 대한 대응으로 감정노동에도 노출되고 있다.

최근 기관사들은 화장실 갈 권리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한 노동안전보건위원장은 "기관사들은 생리현상을 3~4시간 참아야 한다"며 "2007년에는 너무 급한 나머지 달리는 기관실 문을 열고 용변을 보다가 추락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인력 부족, 근골격계질환 시달려 = 열차 차량을 정비하는 노동자들은 근골격계질환에 시달리고 있다. 2012~2021년 서울교통공사 산재 통계 현황을 보면 10년 동안 43명이 근골격계질환으로 산재를 인정받았다. 이 가운데 39명(90.7%)이 차량 분야 노동자였다.

황수선 서울교통공사노조 차량본부 사무국장은 차량 분야 산재 발생원인으로 △인력 감축을 우선하는 구조조정 △시설 노후화에 따른 작업환경 개선 예산 부족 △지방공기업에 대한 행안부의 평가기준 등 행정기관의 불법적인 행정권 남용을 꼽았다.

특히 황 사무국장은 "철도안전법 어디에도 전동차 1량을 정비하기 위한 적정인력이 몇명이 돼야 하는지 규정돼 있지 않다"며 "정비인력 산정기준은 운영사 재량에 맡겨져있어 재정악화를 빌미로 인력을 감축하는 구조조정이 산재를 높이는 주요 원인"이라고 말했다.

◆마스크 착용 안내했다 폭행당해 = 역무 분야 노동자들은 승객들의 감정노동 피해에 시달리고 있다. 승객 안전에 대한 부담감도 매우 높은 직종이다.

서울교통공사 감정노동 피해사건 발생 현황에 따르면 2020년부터 올해 3월까지 감정노동 피해 사례가 375건 접수됐다. 이 가운데 주취폭행이 146건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질서계도(79건), 마스크 착용 단속(71건), 부정승차 단속(31건) 등이 뒤를 이었다.

노기호 서울교통공사노조 감정노동 감독관은 "서울교통공사에서 발생한 감정노동의 가장 큰 특징은 주취폭력에 노출돼있다는 것"이라며 "정신적 피해를 넘어 폭행 상해로 인한 산재요양 신청 건도 매년 증가하는 추세고, 향후 코로나19 이후 연장운행이 재개될 경우 주취자로 인한 감정노동피해는 증가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터널 작업으로 유해물질에 노출 = 선로작업 등 기술 분야 노동자들은 선로를 둘러싸고 일을 한다. 심야에 터널 안에서 야간작업을 하면서 라돈과 디젤연소물질(디젤엔진 모터카) 미세먼지 소음 등에 노출되고 있다.

2005년 34세 노동자가 지하역사와 터널에서 석면과 디젤연소물질에 노출돼 폐암으로 사망해 직업병에 의한 산재승인을 받았다.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폐질환과 관련한 직업성 질환에 따른 산재승인이 발생하고 있다.

서울교통공사 기술직 노동자 한상국씨는 "지하터널은 영업종료 후 환기 설비를 거의 가동하지 않고 있으며 특히 지하철 1호선 서울역~청량리 구간 터널에는 환기시설 자체가 없다"며 "작업자들이 유해물질에 여과 없이 노출돼 폐질환과 심혈관·호흡기 질환에 시달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공통적인 인력문제 해결해야" = 한인임 일과건강 사무처장은 궤도노동자의 안전보건 향상을 위한 제도개선으로 먼저 지하 침실을 지상으로 옮길 것을 제안했다. 많은 궤도노동자가 업무 중 수면을 이루는 침실이 지하에 있어 질병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다.

다음으로 라돈 대책, 심야작업 이동수단인 디젤차량을 전기차량으로 전환하고, 외부 공기 유입 등 환기시스템 마련과 직무별 건강영향평가가 필요하다고 제시했다. 이 밖에 △인력 때문에 안착하지 못한 4조2교대제 연착륙과 교번제 4조3교대제 전환 △2인1조 작업 세분화 등을 제안했다.

한 사무처장은 "최소 작업인원이 지켜지지 않으니 제대로 일을 할 수도 없다"며 "이래서야 시민안전이 제대로 지켜질지 우려스럽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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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8일 '세계 산재노동자 추모의 날'

한남진 기자 njha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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