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미국과 중국 간 경쟁속 필리핀의 균형외교

2023-04-28 12:06:24 게재
한동만 국립외교원 아세안센터 고문, 전 필리핀 대사

최근 남중국해와 대만해협을 둘러싸고 미국과 중국 간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앞마당인 동남아시아에서 미국과 중국 간 대립과 경쟁이 심화되자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은 아세안의 중심성과 다자주의를 강조한다. 아세안 중심성은 아세안이 추구하는 지역 및 국제협력에서 적극적이고 중심적인 역할을 강조하는 목표다.

그러나 아세안에서도 사안별로 입장 차이가 있다.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와 관련해 베트남 필리핀은 중국과 대립관계인 반면,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는 중립적인 입장이다. 미국이 주도한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에 베트남 필리핀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태국 브루나이는 가입한 반면, 친중 성향의 미얀마 캄보디아 라오스는 가입하지 않았다.

동남아 국가 중에 눈에 띄게 친중정책에서 벗어나 친미국가로 변화하고 있는 국가는 필리핀이다. 필리핀은 이전 정부에서 남중국해(필리핀은 서필리핀해로 부른다) 문제에 대해 중국과 대립각을 세우지 않는 대신 중국의 대규모 투자를 기대했지만 중국의 투자는 기대에 훨씬 못 미치고 남중국해를 둘러싸고 중국의 공세가 심해지면서 외교노선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미국에 4곳 군사기지 사용 허락한 필리핀

중국의 대만침공 위협이 커진 것도 영향을 미쳤다. 대만 주변에서 증가하는 중국의 군사 활동이 대만 바로 옆에 위치한 필리핀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필리핀은 향후 양안관계에 긴장이 고조되고 남중국해에서 군사적 충돌로 이어질 경우를 대비해 미국에 4곳의 군사기지 사용을 허락하고 남중국해 인근에서 미국과 군사 합동훈련을 실시했다. 이러자 친강 중국 외교부장은 4월 22일 마닐라를 급히 방문해 미국을 견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미국과 중국의 대립 속에 필리핀은 소위 줄타기 외교, 균형외교를 취하기 위해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이 2022년 9월 미국방문에 이어 2023년 1월 중국을 방문해 남중국해의 공동 탐사 등 중국과의 긴밀한 관계를 발전시키겠다고 했다. 그러고는 5월 1일 다시 미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하지만 미국으로부터의 안보 보호를 받으려면 필리핀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미국에 경사될수록 가장 큰 무역 파트너인 중국과 관계가 나빠질 수밖에 없다.

미중 대립 속에 필리핀의 정책변화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첫째, 한국은 북한 핵 위협은 물론 재래식 군사력 대치 등으로 미국과 안보동맹이 필수지만 필리핀 경우처럼 중국의 영향력도 큰 상황이다. 하지만 대만해협과 남중국해에서의 긴장고조는 동아시아의 안정과 평화, 그리고 항해의 자유에 위협이 되는 만큼 이러한 지역안보 상황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한국전 참전국가인 필리핀 태국과 기존의 합동군사훈련 차원을 넘어 미국과 함께 3자 안보협력을 강화해 나가야 한다.

둘째, 글로벌 중추국가로서 비전을 실천하기 위해 자유주의 지역 질서에 대한 지지를 기본적으로 유지하면서 포용적인 지역 공동체 구축에 기여해나가야 한다. 북한 핵 및 미사일 문제에 대한 다자적 정치적 해결을 모색하기 위해 미국과 북한 간 정상회담을 개최한 바 있는 베트남 싱가포르 등 여타 아세안 자유진영과 다자 차원의 연대를 강화해 북한에 대한 관여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필요하다.

셋째, 미래성장 동력을 창출하고 경제안보를 강화하기 위해 전기차 생산에 필요한 니켈을 많이 보유한 인도네시아 필리핀과 양자 경제협력체제를 강화하는 한편, 미국이 주도한 IPEF나 아세안과 중국이 주도한 역내 포괄적 경제동반자협정(RCEP)에도 적극 참여해야 한다. 특히 새로운 무역 규범이나 디지털 경제 규범을 만드는 과정에서 적극적인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국익 위한 안보와 실리외교 병행해야

넷째, 한국은 책임 있는 중견국가로서 동아시아의 지역안정과 평화에 기여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은 패권을 지향하지 않고 또한 패권국가가 될 수도 없기 때문에 환경오염이나 기후변화, 해양안전과 오염방지, 사이버안보, 테러 등 비전통적인 안보에 대해 협력기반을 만들고 이를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

핸리 존 템플 전 영국 총리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다. 우리의 이익이 영원해야 하고 그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라고 했다. 급변하는 동아시아 국제정세 속에 우리 국익을 증진하기 위해서는 냉철한 정세분석과 함께 국가안보와 경제실리 외교를 병행하는 노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