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불신의 늪, 깊어지는 '안보 딜레마'

2023-06-21 11:29:06 게재
미 해군의 핵추진 순항미사일잠수함(SSGN) '미시건함'이 16일 부산에 입항했다. 길이 170.6m, 폭 12.8m, 수중배수량 1만8000t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잠수함인 미시건함은 사거리 2500km에 달하는 토마호크순항미사일 150여발을 탑재할 수 있다. 4월 윤석열 대통령과 바이든 미 대통령이 채택한 워싱턴선언에 담긴 '미국 전략자산의 정례적 가시성을 한층 증진시킬 것'이라는 합의를 이행하는 차원이라는 게 국방부 설명이다.

SSGN인 미시건함은 핵탄두를 탑재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을 20발 실을 수 있는 핵추진 탄도미사일잠수함(SSBN)과 크기는 같으나 전략적 쓰임새에서 차이가 난다. 미 해군은 전략폭격기,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함께 '핵 3축'을 구성하며 전략적 임무를 수행하는 오하이오급 SSBN 18척 가운데 4척을 실전에서 요긴하게 쓰게끔 재래식 미사일을 탑재한 SSGN으로 개조했다. 미시건함은 우리 군과 '대북초토화작전'을 훈련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 정찰자산이 타격할 북한 목표물을 찾아내 미시건함에 전달하면 토마호크미사일로 초토화한다는 것이다.

가공할 토마호크순항미사일 탑재한 미시건함 부산 입항

미시건함 입항은 북한의 군사정찰위성 '천리마 1형'과 탄도미사일 발사 등에 대한 경고로 해석된다. 북한은 한미가 지난달 25일부터 15일까지 5차례에 걸쳐 실시한 역대 최대규모의 연합·합동화력격멸훈련에 반발해 16일 단거리탄도미사일 두발을 발사했다. 윤 대통령은 6년 만에 실시된 이 훈련에 참관했다. 북한은 윤 대통령 참관소식이 전해진 뒤 국방성 대변인 명의의 '경고입장'을 발표하고 곧바로 단거리미사일을 쐈다. 그리고 그날 미시간함의 부산입항이 공표됐다.

윤 대통령 취임 이후 거의 매일 끊임없이 각종 형태로 강화된 한미연합훈련이 실시되고 있다. 그때마다 북한은 미사일발사 등 군사적 위협으로 맞섰다. 정부는 북한 반발에 미국의 확장억제 증강으로 대응해 왔다. 툭하면 미국 괌에서 전략폭격기 등 전략자산이 한반도에 날아와 무력을 과시한다. 막대한 비용은 어찌 계산되는지 알 수 없으나 어떤 형태로든 '대가'를 치를 것이다. 압도적인 전력우세를 유지하기 위한 첨단무기 구입에도 속도가 붙었다.

북한은 16∼18일 개최한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핵무기를 양적·질적으로 늘려나가겠다고 결의했다. 북한은 미국의 핵위협에 대항하기 위해서라던 핵무기를 남쪽을 향해 선제적으로 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 핵무력법령도 이미 제정했다.

윤 대통령이 화력격멸훈련을 참관한 날은 바로 23년 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서 최초로 남북정상회담을 하고 6.15공동선언을 발표한 날이었다. 남북의 지도자가 이 땅에서 다시는 전쟁을 없게 하자며 화해·협력의 물꼬를 튼 역사적인 날이다. 평양 순안비행장 비행기트랩 위에서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북녘 산하를 한동안 응시하던 김대중 대통령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그리고 남북 지도자가 손을 맞잡아 올리며 합의가 이뤄졌음을 선포하던 감격적인 순간들. 그 후 남북이산가족 상봉,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조성 등 정권에 따라 부침은 있었으나 남북대화와 화해협력 움직임은 꾸준히 모색됐다. 불과 몇년 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정상회담과 판문점선언, 백두산 동반등반, 평양시민 앞 문 대통령 연설 등이 마치 아스라이 먼 옛날 일인 것처럼 느껴진다.

6.15공동선언 발표한 날 한미화력격멸훈련 참관한 윤 대통령

과연 한반도는 더 안전해졌는가? '가짜평화'가 아닌 '진정한 평화'에 더 다가갔는가? 불신에 싸여 힘에 의한 평화, 압도적 우세를 강화하려는 정책이 상대방의 불안감을 자극해 오히려 안보를 위태롭게 하는 '안보 딜레마' 늪에 빠진 것은 아닌가?

한미동맹처럼 비대칭적 관계에서 '자율성'을 극도로 제약받는 '비대칭 딜레마'가 갈수록 심화되고 있지는 않는가? 대통령실이 도청을 당했음에도 항의 한번 못하고, 최대 무역파트너인 중국과의 경제거래에 막대한 손실을 강요받으면서도 제대로 대처조차 못하고 있지 않는가? 한미일 군사협력과 진영외교에 갇혀 과거사문제로 국민의 자존감을 짓밟고, 후쿠시마 핵오염수 방류에도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서글픈 현상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이분법적 흑백논리로 세상을 바라보며 한반도와 국민의 안전을 위협하고, 철지난 '가치외교'로 국제사회의 외톨이로 전락해가는 모습이 안타깝다.
이원섭 본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