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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사회, 질서와 정치 사이의 간극

2023-07-21 11:18:45 게재
박인휘 이화여대 국제정치학 교수

정확하게 언제부터인지는 지적하기 어렵지만, 국제사회라는 표현보다는 글로벌사회라는 표현이 더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있다. '국제(international)'는 국가 행위자를 전제로 한 관계를 의미하지만, 글로벌은 국가들 간 분절된 상황이 아닌 지구촌 전체를 하나의 공동체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국제사회에서는 개별 국가의 외교 행위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국가들 간 '작용-반작용'이 필연적으로 따라올 뿐만 아니라, 외교의 결과는 의도와 무관하게 국제사회를 '제로섬(zero-sum) 게임'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다. 반면 글로벌사회에서 선택과 행동은 제로섬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모두의 이득과 모두의 피해로 연결되는 모두의 몫이 되기 때문이다.

최근 국내 언론에서 윤석열정부의 '가치외교'에 대한 갑론을박을 펼친 바 있다. 팩트만 언급하자면, 필자가 언론보도를 중심으로 조사한 바로는 윤 대통령이 '가치'를 외교 맥락에서 언급한 적은 없다. 고위 외교관료가 몇차례 언급한 적은 있었다. 그럼에도 '가치외교'는 이미 윤석열정부 외교정책의 상징처럼 된 측면이 있다.

필자는 오늘 우리 정부의 외교정책을 직접 논평 대상으로 삼지는 않는다. 다만 매우 논쟁적인 현재의 글로벌사회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이해를 돕기 위한 맥락으로 활용하고자 한다.

우크라전쟁이 빚어낼 글로벌 질서 변화

전후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균열, 세계화 30년에 대한 반성, 코로나 팬데믹, 우크라이나전쟁, 트럼프 현상, 시진핑 3연임, 그리고 전략물자의 글로벌 공급망 재편…. 이 모든 일들은 거의 동시에 발생했다. 역사학의 대가 브로델이 분류한 '사건, 국면, 구조적 변화'라는 관점에서, 지금의 글로벌사회에서 발생하는 변화는 최소한 '국면' 차원에 해당한다. 향후 글로벌사회가 겪을 다양한 변화 중에서 필자는 특히 국가들 간 '다자주의' 관계의 변화에 주목하고자 한다. '다자주의'는 전후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축의 하나였다. 물론 미국의 힘에 의한 '일방주의'가 빈번하게 채택되기도 했지만, 표면적으로 또한 규범적으로 다자주의는 국제사회의 일원인 국가들이 질서에서 쉽게 이탈하지 못하게 하는 구심력으로 작용했고, '채찍'과 '당근'의 준거로 작용하기도 했다.

우크라이나전쟁은 하이브리드 전쟁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모두에게 전쟁과 일상이 공존하고 있고, 무엇보다도 현 글로벌사회의 있는 그대로 모습인 '질서'의 모순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동시에 작금의 글로벌사회가 어떤 지향점의 미래로 나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정치'적 의미를 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현 '질서'의 모순으로 빚어진 우크라이나전쟁에 직면해서 각 국가들은 어떤 '정치'적 이해와 지향점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러시아는 향후 상당한 시간 동안 2등 국가까지는 아니더라도 1.5등 국가로 전락할 가능성이 분명하다. 본격적인 저도(低度) 성장에 진입한 중국 역시 산적한 문제가 한둘은 아니지만 어쨌든 러시아는 중국에 더 의존하게 될 것이다. 미국의 빠진 힘을 중국이 고스란히 메꾸지는 못하더라도, 북한을 포함한 적잖은 국가들이 중국을 쳐다볼 것이다.

새로운 판을 주도하지는 못하더라도 아무 목소리도 안 내기에는 힘이 아까운 제3의 세력들 즉, 인도 브라질 터키 사우디아라비아 등은 초강대국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또 다른 방식의 세력화를 시도하게 될 것이다. 조금씩 강조점은 다를 수 있지만, 요즘 유행하는 언어로 '글로벌 웨스트, 글로벌 이스트, 글로벌 사우스' 간 다자주의 대결은 향후 글로벌사회의 핵심 내용이 될 전망이다.

정책자원 부족, 국제사회 단점만 부각

현재의 글로벌사회에서 '질서'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정치'적 힘은 대표적으로 어떤 것들일까? 최근 리투아니아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의는 스웨덴과 핀란드를 받아들여 32개 회원국을 확인했다. 이로써 나토는 글로벌 웨스트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고, 세계화 30년 동안 나토와 슬라브 세력 사이에 유지되던 균형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유럽 인구의 약 30%를 차지하는 슬라브인이 상당부분 나토에 편입되어 이제는 러시아와 몇개의 위성국가들을 에워싸는 형국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러시아를 중국쪽으로 더 밀어내는 상황이 되어, 미국에 동조하지 않는 국가들의 단합을 더 공고하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미국이 더 불리한 상황에 놓이지도 않을 것이다. 상대적 힘은 빠졌지만, 대외 환경이 그다지 불리하지 않은 아이러니한 상황이 미국을 기다리고 있다.

나토의 확장이라는 압박을 견디지 못해서 러시아가 보편적인 기준의 친서방적인 민주주의 국가가 되는 일은 이론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세계화 30년 동안 독일과 프랑스가 주도한 러시아를 향한 평화공세가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 결정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점을 전 세계는 알게 되었다. 나토의 확장과 나토와 아시아의 연결이라는 '정치'적 의지가 현 '질서'가 안고 있는 모순을 해결해 줄 것인지는 더 지켜볼 일이다.

'질서'와 '정치' 사이의 또 다른 심각한 간극은 정책 추진 '자원(resources)'의 부족이다. 질서를 유지하고 새로운 질서로 나아가기 위한 힘은 각 국가들로부터 골고루 거둬서 만들어져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실제로는 질서에서 이탈하고자 하는 북한 같은 행위자까지 질서 안에 묶어둬야 하기 때문에 글로벌사회 전체에 투입되는 자원은 훨씬 많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이러한 자원의 대부분은 미국과 미국의 설득에 의한 몇몇 동맹국들이 제공해왔다. 소위 '국제공공재'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제는 미국은 물론 어느 누구도 자원 갹출에 참여하려고 하지 않는다. 모든 질서는 문제점을 안고 있고,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조정해 나가며 문제점을 보완해야 하는데 보완을 추진할 자원이 없다면 '글로벌' 사회를 지향해야 할 21세기에 '국제' 사회의 단점만이 더욱 부각될 것이다.

DJ와 리콴유 중간에 위치한 '가치외교'

다시 '가치외교' 얘기로 돌아가보자. 글로벌 질서의 '국면'적 변화 상황에서 특정 이익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가치' 차원의 입장을 강조하는 게 우리나라에 득이 될 수는 있다. 또 아직까지 한국을 '한강의 기적'과 동일시하는 세계인이 다수인 점을 고려할 때, 한국은 경제적 이익에만 집착하지 않고, 국가들 간 제로섬 게임에서 벗어나 글로벌 공동체 차원의 연대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정체성은 바람직한 노력이다.

그런데 '질서'와 '정치' 사이의 간극이라는 관점에서 '가치'가 '이념(ideology)'의 동의어가 되어서는 안된다. 가치는 매우 포괄적이고 수용성이 큰 개념인데 이념 차원으로 전환해 다른 누군가를 배제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가치가 협의로 정의되는 순간 우리 스스로 '질서'와 '정치' 사이의 간극을 더 확장시키게 되고 이로 인한 국익의 손실은 더 커질 수 있다.

1994년 포린어페어스는 리콴유 전 싱가포르 수상과 당시 야당 지도자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글을 몇달의 시차를 두고 게재했다. 논쟁의 핵심에는 세계화가 되었다고 서구 민주주의를 무조건적인 보편적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리콴유의 주장과 아시아적 가치를 인정하다가 혹여 권위주의를 정당화하는 잘못을 범하지 말자는 DJ의 주장이 팽팽히 맞섰다.

우리 정부의 '가치외교'는 이 두 아시아 지도자의 가운데쯤에 서있다. 글로벌 질서 조정기를 맞이해 국가들이 이기심을 앞세워 질서를 더 불안정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DJ의 뜻과 한국이 이룩한 성과와 역량이 이제는 글로벌 연대의 힘이 될 수 있다는 리콴유의 뜻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인휘 이화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