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진단

미래 국제질서 선점 경쟁과 한국의 길

2023-09-22 11:16:31 게재
전재성 서울대 교수, 정치외교학부

현재 국제정세는 미래질서를 둘러싼 경합과 연대의 구축으로 정의될 수 있다.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주의 국제질서 속에서 이익과 힘을 둘러싼 각축이 벌어지던 과거와는 달리, 국제관계의 기초를 이루는 규칙과 규범 자체를 둘러싼 경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미 러시아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모든 국가들이 보편적으로 준수하던 타국의 주권존중이나 내정불간섭 원칙을 정면으로 위배하고 우크라이나전쟁을 일으켰다. 러시아는 탈냉전기 미국의 국제질서 재편 노력이 실패했으며 우크라이나전쟁은 미국 패권주의로 인한 불가피한 결과라는 담론을 제시해왔다. 우크라이나전쟁은 좁은 의미의 안보이익을 둘러싼 러시아와 서방의 대결이라기보다는, 국제안보질서를 근본적으로 재편하려는 러시아의 질서관이 투영되어 있다. 전쟁 직전 중국과 러시아의 연대 역시 우크라이나전쟁의 사전 논의를 넘어 중러 양국이 공유하는 광범위한 미래 국제질서 전반에 대한 것이었다.

군사력을 수단으로 국제질서에 문제를 제기한 러시아와 달리, 중국이 보다 효과적으로 미국 주도 질서를 대체하려는 노력을 성공시킬 수 있을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국은 중국이야말로 현재의 국제질서를 재편하려는 능력과 의도를 가진 유일한 경쟁국이라고 공언하고 이를 좌절시키기 위한 총체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중·러, 연대로 미국 주도 질서 교체 노력

미래질서를 둘러싼 경합은 길고 험한 싸움이 될 것이다. 과거 패권다툼처럼 전쟁으로 쉽게 결판이 나기도 어렵다. 지구화 시대에 국제사회 전체를 놓고 영향권 전쟁을 벌이고 신흥이슈의 표준권력을 둘러싼 실력경쟁도 벌여야 한다. 이 과정에서 타협과 조정 가능성도 열려 있지만 경쟁은 치열할 것이다.

강대국 간 미래질서 경합은 한반도에 쉽지 않은 문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남북한이 강대국의 도움을 받아가며 서로 앞서려고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미래의 세계질서에 대한 전망으로 어떠한 강대국들과 연대하여 역사의 편에 설 것인가 하는 길고 복잡한 싸움을 시작하는 것이다.

김정은과 푸틴의 정상회담은 북한의 선택을 보여주고 있다. 양국의 무기거래 의혹이 불거졌지만, 더 중요한 것은 국제질서에 대한 공감대 형성이다. 러시아와 북한은 미국의 패권에 반대한다는 반패권주의를 주창했고, 특히 북한은 소위 미제국주의에 대한 비판과 맥락을 연결했다. 국제규범을 정면으로 위반한 러시아에 무기를 제공하는 북한은 단순한 이익의 거래를 넘어 미래질서를 향한 가치연대를 선택한 셈이다.

북한은 세계질서가 미국 단극체제에서 신냉전으로 돌입했다고 주장해왔다. 러시아 역시 다중심(polycentric) 세계로의 변화를 담론 차원에서 확산시켜왔다.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이미 그 힘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미국에 반대하고 자유주의 세계질서를 비판하는 북한과 러시아의 연대는 앞으로 전략적 이익과 외교정책을 둘러싸고 심화될 수 있다. 북한은 미국 본토를 핵으로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자 하며, 이를 통해 한국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지원을 제한하고자 하는 군사전략을 추구한다. 변화하는 세계질서에 대한 관점이 세부적인 전략으로 구체화된다는 것이다.

중국의 입장이 다소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러시아와 북한이 제기하는 미국 패권주의에 대한 반대라는 기치를 거부할 가능성은 작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때 국가 주권의 신성불가침함을 강조하는 중국이 러시아를 공개적으로 비판할 수는 없었다. 유엔 안보리 제재를 어기고 러시아가 북한에 군사기술을 지원한다면 중국이 공개적으로 찬성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이는 미래 국제질서 수립이라는 큰 틀에서 상대적으로 작은 문제다. 중국 역시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대한 비판을 제기해왔으며, 압도적인 국력을 가지고 러시아와 북한을 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북중러의 연대가 작동할 것이다.

북한, 신냉전 기회론에 입각한 전략 추구

북한은 미국과 타협을 통한 생존모색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느낄 것이다. 중국과 러시아가 미국을 대체하는 국제질서를 주장하고, 북한과 전략적 연대를 추구한다는 확신이 들수록 미국을 통한 생존 확보 전략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수십년 앞을 내다보고, 신냉전 구도 속에서 북한은 기존질서에서 불법적으로 치부되었던 많은 정책들을 자신있게 추구할 수 있다고 믿을 것이다. 북한의 행동은 변하지 않았지만, 이를 판단하는 기준이 변화하며 불법을 합법으로 변화시킬 것이라는 기대다. 북한은 더 이상 수세적이거나, 한국에 대한 열세를 전제로 한 전략적 입지를 벗어나고자 할 것이다.

미국과 중국, 러시아가 국제질서를 놓고 경합하면서 전략경쟁을 벌이는 것처럼, 북한 역시 장기적 관점에서 한국과 전략경쟁을 벌일 시기가 왔다고 생각할 것이다. 북한이 한국을 남침한다거나 적화통일을 할 것이라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지난 70년간의 국제질서가 변화하는 속에서 강력한 파트너 대국들과 함께 한국과 비등한 전략 경쟁을 벌일 준비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북한은 한국과의 거리두기 및 국가 대 국가 모양새를 당분간 유지하면서 국력 다지기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남과 북의 경쟁은 미중 전략경쟁과 밀접한 관계를 가질 것이며, 더 나아가 국제질서의 미래를 둘러싼 경합과도 연결될 것이다.

한국, 혁신에 기반한 경쟁력 확보가 관건

한국은 지난 30년간 미국 단극체제 하 북핵 패러다임을 넘어 보다 장기적 관점에서 대북관계는 물론 국제질서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첫째, 장기적 관점에서 대북전략을 추구해야 한다. 동아시아의 구도가 신냉전으로 급속히 변화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 미국과 중국 간 경제적 상호의존은 여전히 중요하며, 국가 이외의 다양한 행위자들은 미중관계를 지탱하고 있다. 기후변화와 같은 초국가적 위협 역시 강대국 지정학 경쟁의 비중을 감소시킨다. 최근 미국의 디커플링 패러다임이 디리스킹(위험감축) 패러다임으로 바뀌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작년 11월 발리 미중 정상회담에 이어 올해 11월 샌프란시스코 APEC회담에서 미중 정상회담이 성립될지, 그 속에서 보다 협력적인 미중관계의 틀이 다시 모색될지 등을 살펴보아야 한다.

결국 북한이 원하는 신냉전 구도가 성립될 수 없다는 점을 한국 스스로 인식하고 북한에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중국과 러시아의 이해관계가 미국을 전적으로 적대시하는 쪽으로 수렴되기는 어렵다. 한국은 중국과 러시아의 전략 변화를 주시해가면서 중러에 대한 북한의 의존을 견제해야 한다.

둘째, 남북 간의 전략경쟁이 현실화되고 장기화된다고 해서 비핵화를 통한 남북 간의 화해와 관계회복의 목표를 버릴 필요는 없다. 북한이 원하는 신냉전 기회론이 비핵화 회의론으로 직접 연결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중국과 러시아 모두 변화된 국제질서 속에서도 핵 비확산은 여전히 양국의 이익에 일치한다. 북한의 비핵화 역시 지정학적인 손해를 끼치지 않는 한, 중러 모두 합의할 수 있는 목표다. 한국이 비핵화에 대한 굳건한 의지와 로드맵을 가지고 북한에 대한 압박과 타협을 동시에 추구할 때, 장기적으로 타결의 가능성은 다가올 것이다.

셋째, 변화하는 세계질서 속에서 한국의 국력과 정책수단이 가장 중요하다. 북한에 대한 월등한 군사적 억제력을 가지고 북한의 핵무기가 사실상 무용함을 증명할 수 있는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 더불어 핵 패러다임을 넘는 4차산업혁명, 신기술 패러다임에서도 북한을 앞설 수 있는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 혁신에 기반한 한국의 경쟁력은 미중 전략경쟁 속에서도 한국의 협상력을 높일 것이다. 한국의 국력을 증대해가면서 대북정책과 외교정책을 함께 추구할 때 한반도의 난제를 해결할 기회가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