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

통계는 정쟁·수사의 대상 아니다

2023-11-14 11:56:32 게재
최은영 한국도시연구소 소장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월간 실업률 8%'는 정치적 의미가 크다. 1936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이후 실업률이 8%가 넘으면서 재선에 성공한 대통령이 한명도 없기 때문이다. 오바마 대통령 취임 직후인 2009년 2월을 빼고 재선에 도전한 선거 막바지까지 모든 달의 실업률이 8%가 넘었다. 선거가 한달 여 남은 2012년 10월 5일 노동 통계국(BLS)은 9월 실업률이 7.8%로 3년 8개월 만에 8% 밑으로 떨어졌다는 예상 밖의 결과를 발표했다.

대선판을 흔들 수 있는 통계 수치였고, 잭 웰치 전 GE 회장을 중심으로 공화당 인사들이 '실업률 조작설'을 제기했다. 앨런 크루거 백악관 경제자문위원장은 "무책임하다.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당국이 통계를 조작한다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믿지 않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부시행정부에서 의회예산국 국장이었던 더글라스 홀츠이킨은 "통계를 생산하는 사람들은 전문가로서 직업정신을 가지고 일한다. 그들 가운데 통계가 조작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하는 등 공화당 내부에서도 반박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미국사회 초당파적 신뢰로 통계의 정쟁 도구화 막아

웰치는 결국 트위터에 "내가 기억하는 한 백악관이 통계를 조작했다고 말한 적이 없다"며 꼬리를 내렸다. 음모론은 수면 아래로 내려갔고, 이후 대선 과정에서 쟁점이 되지 않았다. 2012년 미국 사회는 통계에 대한 초당파적 신뢰로 통계가 정쟁의 도구로 전락하는 것을 막았다.

2023년 우리나라에서는 통계가 정쟁의 대상을 넘어 감사와 수사를 통한 사법처리 대상이 되어가고 있다. 박근혜정부 때 통계청장이었던 국민의힘 유경준 의원은 야당 의원일 때 문재인정부의 통계 조작 의혹을 제기했다. 윤석열 정부가 집권하면서 여당 의원이 된 후에도 통계 조작 주장을 계속하고 있다.

윤석열정부가 출범한 직후 감사원은 통계 조작 의혹에 대한 감사에 착수했다. 2023년 9월 15일 감사원은 '대통령비서실과 국토교통부 등은 통계 수치를 조작하는 등의 불법행위를 하였고, 관련자 22명에 대해 검찰 수사를 요청했다'는 중간 결과를 발표했다. 감사위원회 의결이 이루어지지 않아 확정되지 않은 중간 결과였지만 감사원은 통계 조작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불법이라는 사법적 판단도 내렸다. 문재인정부 4명의 청와대 정책실장 전원이 검찰 수사 대상이 되었다. 일부 언론과 전문가들은 문재인정부의 통계 조작을 기정사실화하며 준엄하게 꾸짖는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미국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도 통계 생산에 관여하는 공무원들은 직업정신을 가지고 일한다.

그들 가운데 통계가 조작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수 십 년간을 통계청과 국토교통부에서 일한 직업 공무원들이 불법임을 알면서 통계를 조작했을 리가 없다. 범죄는 행위 못지않게 동기가 중요한데, '철밥통'이라 불릴 정도로 신분이 보장된 주무관, 사무관 과장 국장 등이 5년이면 끝나는 정권의 지시에 따라 불법행위를 할 동기가 없기 때문이다.

정쟁 대상 넘어 감사와 수사 통한 사법처리 대상으로 전락한 통계

감사와 검찰 수사를 받고, 법원에서 재판을 받는 것은 끝 모를 기나긴 터널에 갇히는 것과 다름없다. 유무죄 결론과 상관없이 당사자는 큰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 마다 낯선 사람이 집 앞에서 자택 압수수색영장을 들고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 가슴 졸여야 하는 처지가 된다. 형사재판은 피고인의 참석이 필수인데, 매번 참석해서 하루종일 말 한마디 못하고 꼼짝없이 앉아 있어야 한다. 증인이 많은 재판은 몇년 씩 걸리는 것이 보통이다.

통계 조작과 관련해 광범위한 압수수색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기대 난망이기는 하지만 검찰 수사는 통계 조작 의혹이 객관적인 증거로 범죄 동기와 행위를 입증할 수 없는 '허무맹랑한 소리'일 수 있다는 합리적인 의심에 기반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감사원과 검찰은 통계 조작 관련 음모론이 10여년 전 미국 대선 과정에서 어떻게 결론이 났는지를 반드시 살펴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