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채시장 랠리, 치솟는 부채문제 간과

2024-01-12 11:12:15 게재

블룸버그 "금리인하 기대감 집착" … 경제선진국 올해 국채 순발행액 2조1000억달러

지난해 11월 초순경 주요국 국채시장 화두에서 갑자기 사라진 단어는 국채 공급물량이었다. 선진국 국채가격이 연일 급등하면서 국채금리가 하락해 투자자들이 절실히 원했던 수익을 안겨주자, 급증하는 예산적자에 대한 불안감이 사라졌다. 하지만 얼마나 오래 지속될까.

조만간 미국과 영국 일본 유로존 각국 정부는 전례 없는 속도로 국채를 시장에 쏟아내기 시작할 전망이다. 지난 10일 블룸버그 인텔리전스의 추산에 따르면 이들 국가의 2024년 국채 순발행액(발행액-상환액)은 2조1000억달러 규모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지난해보다 7% 증가한 액수다.

대부분 국가의 중앙은행들은 더 이상 경제성장을 위해 국채를 매수하지 않을 방침이다. 따라서 각국 정부는 전세계 투자자로부터 더 많은 매수 주문을 유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높은 국채 수익률을 제시해야 한다.


지난해 8월 신용평가사 피치레이팅스가 미국채 급증에 대한 우려로 미국 신용등급을 기존 AAA에서 AA+로 강등하면서 벤치마크인 10년만기 미국채금리가 16년 만에 처음으로 5%를 넘어서기도 했다.

투자자들은 인플레이션 둔화로 각국 중앙은행이 금리인하를 시작할 것이라는 생각에 쏠려 있다. 덕분에 국채물량 증가에 따른 불안감은 최근 들어 사라졌다. 하지만 많은 국채시장 분석가들은 현재의 수급역학을 고려할 때 불안감이 다시 고개를 드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국채 수익률은 올해 들어 이미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ING 파이낸셜마케츠 글로벌 채권·금리전략 책임자인 파드라익 가비는 "현재 시장은 연준 금리사이클에 집착하고 있다"며 "그같은 생각이 사라지면 재정적자에 대한 우려가 다시 시작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제통화기금(IMF) 데이터에 따르면 코로나19 팬데믹 경기부양책과 고령화인구에 대한 의료·연금, 화석연료로부터의 전환을 위한 자금조달 등을 위해 차입을 늘리면서 선진국 전체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공공부채는 20년 전 약 75%에서 현재 112% 이상으로 급증했다.

달러와 유로화. 로이터=연합뉴스


급증하는 부채가 차입비용을 얼마나 증가시키는지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수년 전 영국중앙은행과 하버드대의 공동연구에 따르면 한 국가의 GDP 대비 부채 비율이 1%p 증가할 때마다 시장금리가 0.35%p 상승한다. 하지만 최근 수년 동안 이러한 계산이 제대로 들어맞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21세기 들어 미국 GDP 대비 부채가 급증했지만 국채 수익률은 하락했다.

ING 가비 책임자는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그 연구결과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미국의 연간 재정적자가 GDP의 6%에 달한다. 이는 역사적 기준의 약 2배에 달하는 수치"라며 "국채금리에 또 다른 1%p를 추가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이는 정부의 이자부담을 늘리고 적자폭을 더욱 심화시켜 일종의 악순환을 초래한다. 뿐만 아니라 기업과 소비자의 차입비용을 높이고 경제성장을 억제할 수 있다.

다른 국가들의 공공재정 상황은 미국보다 암울하진 않지만 영국과 이탈리아 프랑스 등의 국가들은 올해 예년보다 더 큰 규모의 적자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은 최근 "영국 정치인들이 더 많은 지출을 공약으로 내세워 표를 얻으려고 하면 국채 매도세를 촉발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하지만 국채 강세론자들의 생각은 다르다. HSBC홀딩스의 글로벌 채권리서치 책임자인 스티븐 메이저는 국채 강세와 관련해 가장 큰 목소리를 내는 사람 중 하나다. 그는 피치의 신용등급 강등에 따라 여러달 동안 10년물 미국채금리가 1%p 급등한 것에 놀랐다고 인정하면서도 국채가격이 강세를 띨 것이라는 견해를 유지하고 있다.

메이저는 부채공급 우려에 대한 질문에 마을에서 감자를 파는 농부들에 대한 비유를 즐겨 사용한다. 그는 "감자 공급이 늘어난다고 해서 감자 가격이 반드시 하락한다고 볼 필요는 없다"며 "그 이유는 방정식의 수요 측면을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길 아래 마을이나 중동 국부펀드에서 더 많은 구매자가 나타날 수 있다. 그리고 재정적자가 가장 심각해지는 경기침체기에는 오히려 국채 안전성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메이저는 "공급을 늘리면 가격이 내려가야 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국채 수요가 공급 증가를 따라잡지 못한다면 정부가 장기국채 판매를 줄이고 단기국채를 더 많이 발행하면 된다"고 덧붙였다.

이는 지난해 미국채 매도가 거세졌을 때 미국정부가 취한 조치다. 지난해 11월 초 재닛 옐런 재무장관은 미국채 10년물과 30년물 국채의 공급증가 속도를 늦추고 시장 예상보다 더 많은 1년 이하 초단기국채(T-bills)를 발행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조치는 자체적인 위험이 없는 건 아니지만 불안한 투자자들을 안정시키고 국채가격 반등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도움이 됐다.

하지만 JP모간체이스의 애널리스트들은 미 재무부가 올해 초단기국채 발행물량을 줄일 것으로 예상한다. 이 은행은 올해 발행될 초단기국채 규모가 지난해 발행량의 약 1/3에 해당하는 6750억달러일 것으로 내다봤다.

2020~2022년 헤지펀드 '브리지워터 어소시에이츠'의 수석투자전략가였던 레베카 패터슨은 "미 재무부는 국채발행 시점과 발행 종류에 대해 실용적인 접근을 시도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면서도 "그렇지만 큰 그림은 바뀌지 않는다. 정부지출을 충당하고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발행해야 하는 국채의 공급량은 분명히 국채금리를 결정하는 요소"라고 지적했다.

블랙록 리서치부문 부대표인 알렉스 브레이저는 "최근 수년간 미국과 유럽에서 재정지출이 급증했다. 부채 부담을 늘리고 국채시장에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2가지 큰 문제는 글로벌 경제성장 둔화와 국채금리 상승"이라고 말했다.

유럽중앙은행(ECB)은 코로나19 팬데믹 경기부양책으로 촉발된 인플레이션 급등을 억제하기 위해 기준금리를 4% 이상으로 인상했다. 영국 중앙은행과 미 연준은 이보다 더 높은 5% 이상으로 인상했다. 현재 예상되는 대로 올해 금리인하가 시작되더라도 지난 20년 동안 지배적이었던 제로금리 시대와 유사한 상황으로 돌아갈 가능성은 거의 없다.

블랙록 브레지어 부대표는 "이자비용은 더 커지고, 부채 부담에서 벗어날 길은 더 어렵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프랑스 재무부는 올해 국채이자 지급액이 국방예산을 초과할 것이라는 전망에 고심하고 있다. 2027년엔 국방예산의 2배로 늘어날 전망이다. 호주정부는 2026년 중반 사상최고치로 치솟을 것으로 예상되는 만기부채를 상환하기 위해 현금을 비축하고 있다.

세계은행은 지난해 3월 인플레이션을 유발하지 않고 경제가 성장할 수 있는 전세계 잠재성장률이 2030년 2.2%로 떨어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30년 만에 최저치다. 일반적으로 경제확장을 이끄는 3가지 동력인 투자 무역 생산성이 모두 둔화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블랙록 브레지어 부대표는 "거시적 환경이 좋지 않기 때문에 재정적자가 문제가 된다"며 "장기국채를 멀리하는 게 좋다"고 말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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