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살균제, 국민 상대 독성시험" 유죄

2024-01-12 11:12:46 게재

2심 재판부 "안전성 검사 없이 상품화" 판단

피해자들 "고작 금고 4년이라니, 피해대책 내 놔라"

유해 가습기 살균제 사건으로 기소돼 1심에서 무죄를 받았던 SK케미칼과 애경산업 전직 임직원 등 13명이 항소심에서 모두 유죄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피해자들은 "고작 금고 4년이 뭐냐"며 가해 기업뿐 아니라 정부도 책임을 지고 피해 대책과 재발 방지 조치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서울고등법원 형사5부(서승렬 부장판사)는 11일 업무상 과실치사 등 혐의로 기소된 홍지호 전 SK케미칼 대표와 안용찬 전 애경산업 대표에게 각각 금고 4년형을 선고했다. 다만 법정구속은 하지 않았다. 함께 기소된 회사 관계자 등 11명에 대해서도 금고 2년∼3년 6개월이 선고됐다. 금고형은 확정되면 징역형처럼 교도소에 수감되지만, 징역형과 달리 강제노역은 하지 않는다.

이들은 각 회사에서 클로로메틸아이소티아졸리논(CMIT)·메틸아이소티아졸리논(MIT) 등 독성 화학물질이 포함된 가습기 살균제 '가습기 메이트'를 제조·판매해 98명에게 폐 질환이나 천식 등을 앓게 하고 그 중 12명을 사망케 한 혐의로 2019년 7월 기소됐다.

눈물 훔치는 가습기살균제 피해자│가습기살균제 참사 가해기업 유죄 선고를 호소하는 피해자·시민사회단체 관계자가 11일 오후 서울 서초구 중앙지방법원 인근에서 열린 유해 가습기 살균제를 제조·판매한 혐의로 기소된 안용찬 애경산업 전 대표와 홍지호 전 SK케미칼 대표의 2심 선고 관련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훔치고 있다. 연합뉴스 임화영 기자


◆법원 "살균제와 폐질환 인과성 인정" = 재판부는 전국민을 상대로 가습기살균제의 만성 흡입독성 시험이 행해진 사건으로 판단했다. 안전성 검사도 하지 않고 상품화 결정을 내려 불특정 다수가 원인을 모르는 상태에서 큰 고통을 겪었고 상당수 피해자는 사망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참혹한 피해를 입는 등 존엄성을 침해당했다는 이유이다.

현재까지 정부가 인정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5667명 가운데 홈크리닉가습기메이트 사용자(다른 살균제와 복수 사용 포함)는 28.8%인 1633명으로, 옥시에 이어 두 번째로 많다. 피해자가 가장 많은 가습기살균제는 옥시레킷벤키저(옥시)의 '옥시싹싹 뉴가습기당번'으로 4748명에 달한다. 2018년 1월 신현우 옥시 전 대표가 대법원에서 징역 6년 형을 확정받으면서 이 물질과 폐 질환 간 인과관계는 법적으로 최종 인정됐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사망자는 1262명이다.

그런데도 3년 전 1심 재판부는 업체대표(피고인)들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살균제 사용과 폐 질환 등의 구체적 인과관계의 신빙성도 인정된다며 1심 판단을 뒤집었다. 전문가들의 연구를 고려하면 CMIT·MIT가 이 사건 폐 질환 또는 천식을 일으키거나 악화시키기 어렵다는 판단은 더 이상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봤다.

특히 재판부는 "유공(SK이노베이션의 전신)이 1994년 독성 시험을 해야 한다는 내부의 의견을 무시하고 CMIT·MIT 성분 제품을 처음으로 출시했다"며 "이듬해 서울대 수의과대학에서 문제의 소지가 있어 실험이 더 필요하다는 의견을 밝혔음에도 계속 판매가 이뤄졌다"고 질책했다. 그러면서 제조·판매업자에게 당연히 요구되는 주의의무를 위반한 업무상과실에 해당된다고 밝혔다.

◆일부 피해자 "살인죄로 처벌해야" 주장도 = 판결 후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와 유가족 모임, 환경운동연합 등은 이날 오후 서울고법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1심 무죄와 달리 2심에서 유죄가 선고돼 다행"이라면서도 "피해자의 규모와 피해 심각성을 볼 때 검찰의 구형량도 솜방망이인데 (선고는) 그에도 못 미쳤다"고 밝혔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유족 김태종씨는 "내 아내는 2008년 숨이 안 쉬어진다며 입원한 것을 시작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12년 1개월 동안 중환자실을 전전했다"며 "가습기살균제 사건으로 1800명이 넘는 사람이 사망했는데 이 살인자들에게 고작 금고 4년이 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은 가해 기업뿐 아니라 정부도 책임을 지고 피해 대책과 재발 방지 조치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일부 피해자 가족은 살인죄로 처벌해야 한다며 검찰에 상고를 요구하기도 했다.

◆기업들, 차일피일 책임만 미뤄 = 이날 법원 판결에도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보상은 여전히 산 넘어 산이다. 2022년 4월 민간기구인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를 위한 조정위원회'를 통한 조정이 무산된 뒤 해결을 위해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기 때문이다. 지난해 9월 국회에서 한 차례 공청회가 열린 것을 제외하고는, 총선 준비로 분주한 정치권에서도 뚜렷한 행동에 나설 조짐이 없다.

다만 이번 판결로 SK케미칼 등 가습기살균제 원료물질 생산자가 더 책임져야 한다는 옥시와 애경 등의 주장에 힘이 실릴 수는 있다. SK케미칼이 법정에서 가습기살균제 관련 책임을 본격적으로 인정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앞서 조정위가 제시한 조정안을 수용하면 피해자 구제급여(최대 9240억원)의 54%와 7.4%를 각각 부담해야 했던 옥시와 애경은 '원료물질 사업자'의 추가 분담을 요구하며 조정안을 거부한 바 있다. SK케미칼은 옥시보다 훨씬 낮은 17.1%의 부담을 적용받았다. 지난해 옥시는 '앞으로는 분담금을 낼 수 없다'고 환경부에 통보했고, 애경산업은 낸 분담금을 돌려달라며 행정소송까지 제기했다. 기업들이 차일피일 책임을 미루면서 그 해결은 요원한 실정이다.

서원호 기자 os@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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