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관계 141년 비사 | (18) 갑신정변 후 미국으로 망명한 변수(邊燧)

조선인 최초 미국 대학 졸업생이 되다

2024-01-19 11:33:38 게재
한종수 한국 헤리티지연구소 학술이사

1891년 10월 23일자 미국 일간지에는 '메릴랜드 농과대학(Maryland Agricultural College)을 다닌 조선의 귀족 변수가 워싱턴 D.C. 외곽에서 지난 밤(10월 22일) 볼티모어와 오하이오 철로에서 기차에 치어 사망했다'는 부고가 실렸다. 이 부고기사에는 '이 조선 사람은 교외에 위치한 집으로 가기 위해 기차를 멈추길 원해 난간에 서서 모자를 흔들어 신호를 보냈다. 기관사는 그 남자를 봤지만 적절한 때에 기차를 멈추지 못했다'고 상세한 사고 경위가 적혀 있다.

당시 30세의 젊은 조선인 변수(邊燧, 1861~1891)가 불의의 기차 사고로 사망했다. 그는 미국에 망명한 신분으로 1891년 6월 메릴랜드대학을 졸업하고 농무부에서 촉탁직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갑신정변 주역에서 미국 망명객으로

그는 1883년 미국 보빙사의 일원으로 전권대신 민영익을 수행한 이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과 통리내무아문(統理內務衙門) 주사를 역임하며 고종을 가까이서 보필했다. 개화파였던 그는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3일 천하로 실패한 후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등과 일본으로 탈출했다.

메릴랜드대학 시절의 변수

변수는 일본 망명 중 민영익이 상하이와 홍콩을 왕래하며 홍삼수출권을 독점해 번 수익금을 훔쳐 달아난 중국 유학생 민주호(閔周鎬) 윤정식(尹定植)과 함께 1886년 1월 24일 미국으로 망명길에 오른다.

변수와 민주호는 대학 입학을 위해 벌리츠어학원(Berlitz Academy)을 이수한 후 1887년 9월 메릴랜드 농과대학에 입학한다. 이 학교는 모든 학생들이 사관생도의 제복 차림으로 엄격한 군대식 교육을 받는 보수적 학풍으로 유명하다.

1856년 설립된 메릴랜드대학은 농과대학으로 시작했는데 1912년 11월 29일 발생한 큰 화재로 기숙사 강의실과 사무실 등 절반 이상 큰 손실을 입었다. 하지만 그 당시 자료 가운데 변수의 자료들은 잘 보관되어 그 자료를 근거로 변수의 대학 생활을 확인할 수 있다.

변수의 메릴랜드 농과대학 졸업장

1887년 9월 입학 당시 '학교요람'을 보면 학생수는 46명이다. 그중 '민주호(Min Chou Ho, Seoul, Corea)'와 '변수(Penn Su, Seoul, Corea) 조선 학생 2명이 포함되어 있다. 그의 동기들 중에는 남북전쟁의 영웅 암멘(Daniel Ammon) 제독의 아들 그랜트 암멘(Ulysses Grant Ammon)과 메릴랜드대학 창설자 찰스 베네딕트 칼버트(Charles Benedict Calvert)의 아들 칼버트(Calvert)도 있었다. 변수와 민주호는 조선의 반역자이자 정치적 망명객 신분이라 당시 조선정부의 지원과 보호는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런데 그들은 동기 아버지인 찰스 베네딕트 칼버트와 암멘 제독의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

1888년 1월 19일은 초대 주미특명전권공사 박정양(朴定陽)과 관원들이 워싱턴 DC에 부임해 공사관을 개설해 운영을 시작한 시기다. 박정양은 민영익의 돈을 훔친 주범은 윤정식이고 민주호는 14세 어린 소년이라는 사실을 들어 무죄라고 선언하면서 귀국을 종용했다. 결국 민주호는 메릴랜드 농과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해 변수 혼자 계속 학업을 이수하게 된다.

당시 대학에는 졸업앨범이 없었다. 학생들은 사진관에 가서 개별적으로 사진을 찍고 동기들끼리 선물로 주고받았다. 변수의 사진은 볼티모어에 가서 찍은 것이다.

변수는 4년 만인 1891년 6월 4일 졸업했다. 이 날은 한국인 최초로 미국 대학을 졸업한 날인 셈이다. 또한 변수는 졸업식장에서 졸업생을 대표해 상업(Commerce)을 주제로 연설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변수는 미국 대학에서 농업을 공부하며 귀국하면 농업 지식이 조선 백성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다. 그는 대학졸업 후 미국 농무부에서 청나라 일본 조선의 농작물 통계자료를 번역하고 표를 만드는 일을 했다.

변수의 묘비

변수는 사망 일주일 전 수습기간이 만료되지만 청나라 농업 현황에 관한 편집 작업에 참여하고 있어 재임명된다. 그는 기회가 닿는 대로 조선에 돌아갈 목적을 가지고 있어 영구적인 임명은 원하지는 않았다. 사고 역시 청나라에 관한 자료 수집차 모교인 메릴랜드대학을 방문했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기차에 치인 것이다.

자기 무덤자리 내준 암멘 제독

'워싱턴포스트' 등 여러 매체에서 그의 죽음을 알렸고, 미국정부는 그의 사망 후 즉각 조선공사관에 사망 소식을 전했다. 그러나 조선공사관은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며 후속 조치를 거부했다. 변수가 갑신정변에 참여해 수배령이 떨어진 반역자였기 때문이다.

이 소식을 접한 당시 서리공사 이채연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도 변수와 같은 나이인 30세였다. 결국 그의 유해는 조선 땅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친구 아버지인 암멘 제독은 자기가 묻히려 마련해 뒀던 땅을 변수의 무덤으로 내준다.

아래는 변수를 기리며 묘비에 새겨진 글이다.

변수를 추모하며
그는 조선 최초의 보빙사(견미사절단)로 미국을 방문했고 1891년 6월 메릴랜드대학을 졸업한 후 1891년 10월 22일 기차 사고로 사망했다.
암멘장군 가족과 동급생 일동



윤치호는 변수의 부음을 듣고 고인을 애도하는 추모의 글을 일기에 남긴다.

"1882~1883년 일본에서 농업계통의 학교에서 수학하였고, 귀국 후 국왕의 은총을 받아 출세했다. 그는 본의 아니게도 김옥균 음모(갑신정변)에 가담, 정변 실패 후 영원히 해외로 망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여름 워싱턴에서 그를 만난 일이 있었는데, 그는 미국 최신식 유행스타일의 양복을 입은 멋진 신사차림이었다. 4년 만에 메릴랜드 농과대학을 졸업하고, 월 60달러의 보수를 받고 미국 농무부 농무국 종자과(種子課)에 취직했고, 이어 미국시민으로 귀화했다는 것이다. 그는 마음이 착하고 다정다감한 사나이다. 그러나 자기의 주견(主見)이 결여된 것이 그의 결점이다."

변수는 사망한 지 19년이 지난 1910년 7월 18일 종2품 규장각부제학으로 특증된다. 반역자에서 정상적인 신분으로 신원된 것이다. 조선이 국권을 상실한 경술국치일을 불과 한달여 앞둔 시점이었다.


■ 참고자료
1. 《순종실록》(1910.7.18.)
2. KBS [역사실험], 최초의 미국대학졸업생 조선청년 변수의 꿈(2013.03.13.)
3. 《원주변씨대동보》 호군공파 3권
4. Pittsburg dispatch, A BRIGHT COREAN KILLED(1891.10.22.)
5. Yun Chi-Ho's Diary, November 2, 1891